시곗바늘은 늘 나를 재촉했다. 복도를 지날 때도, 계단을 오를 때도, 심지어 커피를 마실 때도 바늘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다. 이제는 천변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레 시간이 흘러간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실수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반석천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퇴직 후 대전살이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이 도시가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좁은 천변 길 양옆으로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지만,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는 도시의 숨결처럼 생동감 있게 들린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도 매력적이다. 금계국이 피어나고,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저마다의 계절을 노래한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도시의 리듬이 느껴진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산책하듯 걷는 나를 스치면, 마치 느린 화면 속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다.
최근에는 '어반스케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펜으로 도시의 건물과 나무들을 그리는 일은 생각보다 매력적이다. 이번 주에는 처음으로 물감을 사용해 보았는데, 무채색이던 건물들이 색을 입으며 생동감을 얻는 모습이 신기했다. 스케치북 위에서 건물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다.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춘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도 그런 것 같다. 때론 흔들리는 선이 되기도 하고, 때론 단단한 면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조금씩 나도 도시의 일부가 되어간다.
강사님께서 "잘 그리셨네요"라고 말씀하실 때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렇게 단순한 칭찬에 들뜨다니, 나도 참 순진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진심 어린 칭찬은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한다. 젊은이들로 가득한 거리와 교정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스무 살로 돌아간 것 같은 설렘이 찾아온다.
오랫동안 살았던 곳을 떠나 아는 이가 없는 이곳으로 오는 일을 결정했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 늘 바쁘게 살아온 시간들이 갑자기 멈춰버릴 것만 같았고,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움도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 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 낯선 도시가 점점 친숙해지는 과정... 이 도시는 이제 새로운 친구 같다. 매일 마주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