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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 Dec 01. 2024

물꽃처럼 번진 문장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야기나 장면이 있다. 어떤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심장을 조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책 속 문장 하나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질 때가 있는데 이번에 그런 책을 만났다.


소설 속 이야기가 특별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릴 때 물을 너무 많이 섞어 색이 의도치 않게 번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예상치 못한 물꽃이 종이 위에 피어난다. 실수로 망쳤다고 생각했던 그림이 뜻밖의 매력을 품을 때처럼, 이 책의 문장들은 그런 물꽃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시를 즐겨 읽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소설 속 장면 묘사들은 천천히 다가왔고, 나는 그 문장 속으로 번지듯 스며들었다. 강렬하게 고발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듯한 표현들이었다.


"반달을 가린 연회색 구름에서 창백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어. 그 빛이 만든 덤불숲 그림자가, 죽은 얼굴들 위로 기이한 문신 같은 문양을 새겨놓았어."


혼령이 된 소년이 썩어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그날 밤 있었던 일을 이렇게 들려준다. 창백한 빛 아래 켜켜이 쌓인 희생자들, 그 옆 나무와 무심히 지켜보는 숲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특히 '창백한 빛'이라는 표현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면서도 먹먹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신 참혹한 이야기에 매달려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잊지 말아 달라고 소년들이 간절히 부탁하는 것만 같아 두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너무도 아프고 슬펐지만, 그걸 참고 이 글을 써 내려갔을 작가의 마음이 전해졌다.


얼마 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한참 전에 읽었던 책이 떠올랐고, 익숙한 작가의 이름이 크게 보였다. 우리나라 소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기쁜 마음에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다가 '소년이 온다'를 펼쳤다.


1980년 5월, 광주의 봄날도 분명 따뜻했을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저 그곳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5월처럼, 친구들과 뛰놀던 풋풋한 소년들과 꿈으로 가득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진압군이 들이닥친 그날, 동호는 어머니가 같이 가자며 손을 잡아끌었지만 "그냥 나올 수 없다"라며 되돌아간다. 그가 애타게 찾던 친구도, 그리고 동호 자신도 모두 총에 쓰러진다. 작가는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소년은 이렇게 부탁한다.


"우리는 고귀하니까…,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강렬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차분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차갑지만 따스하게, 아프지만 섬세하게 담아냈다. 날카로운 비판이나 강압적인 설득이 아닌, 부드러운 말과 글이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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