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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19. 2023

쉬운 동물복지에 대하여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작가님께서는 그럼 확실한 비건이세요? 저희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비건 또는 비건지향의 분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열리는 한 축제에서 나에게 보낸 메시지다. 나의 가치관과 삶의 내용에 대해 공유하고 싶은 장이 필요했던 나는 먼저 우리 지역의 다양한 커뮤니티에 나를 소개하기로 했다. 나의 첫 산문집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나의 '다음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나의 첫 산문집은 나의 이야기였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살고 있는 작가로,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나'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 나의 첫 책 <읽기의 의미>였다. 이 책을 읽었다면 알 수 있지만 이 책 속에 있는 글들은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쓸 것인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세상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글이다. <읽기의 의미>가 개인적이라면 개인적 일 수도 있는 글이기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책을 팔기 위한 큰 이벤트는 만들지 않았다. 나는 이 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 더 큰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유명해지고 싶은 것보다는 그다음, 또 그다음, 또 그다음의 나 다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요즘 출판 시장도 자본의 힘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서 책 속에 알맹이 같은 내용이 없더라도 돈으로(또는 돈이면) 움직일 수 있지만 나는 돈도 없을뿐더러 나의 인생을 담은 이 글을 고작 돈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지낸 과거의 날들처럼 앞으로의 날들도 자연스럽게, 나의 부족함과 또 충만함이 있는 그대로 내 삶에 발현되기를 바랐다. 감사하게도 나의 글은 내가 예상하지 않는 방향성으로 흘러가고 있다.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었고 이를 시작으로 또 다른 글을 읽었다는 후기를 듣기도 한다. 참 감사한 일이다. 누군가는 조용히 누군가는 온라인에서 저마다의 감상을 남겨주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를 떠나 이제는 어떻게, 어디로 갈지 모르는 문장들이 내 삶을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토록 불확실한 열린 결말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설레게 한다. 다시금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내가 진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쓰게 될 날들이 이제 나의 인생에 더욱더 성큼성큼 와 줄 것을 기대하며 믿고 있다. 


나의 첫 산문집 안에는 '나는 앞으로 동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라는 글이 담겨 있다. 내가 동물에 대해 쓰고자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문제이지만 그것이 곧 우리 사람을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존재 의식에 대하여 자연을 외면하고 동물과의 삶을 동떨어진 것이라 규정하는 순간 인간은 곧 파괴의 길로 가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스스로 살아남지만 인간은 자연에 기대지 않고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자연을 거슬러 문명을 만든 인간은 신보다 조금 못한 존재임을 과시하며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가는 건물을 쌓아 올리거나 자연의 평야를 인간이 발로 밟기에 편안한 길로 만들기 위해 굴곡을 모두 없애는 등의 역사는 지금 우리의 삶에도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해와 달의 움직임과 지구가 공존하는 자연의 힘 앞에 높은 건물과 평평한 땅도 한순간에 속절없는 바벨탑이 된다. 무뎌진 인간의 편리함을 바라보고도 자연은 오랜 시간 잠잠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도 어찌할 바를 모른 것만 같다. 인간이 파괴한 날들에 대해 자연은 아주 오랜 시간 침묵해 주었고 지금도 스스로 회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은 그런 자연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다시 인간 만의 시간을 창조해 내려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런 조급함으로 끝내 회복하는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지체 말고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조급함이 조금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육식을 하는 인간이 육식을 쉽게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게 된 모든 과정이 너무 빠르게 발전한 것에 대하여, 또 반면에 육식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아이러니하게 사람들의 인식과 생각을 채식으로 바꿔야겠다는 어느 채식주의자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무엇하나 서로가 서로를 조율하려 하지 않고 서로를 비난하며 혐오하는 등의 모습으로 발현되는 모든 과정이 슬프게 느껴진다. 나는 모든 것이 자연의 시간에 우리의 리듬을 맞추지 않고 인간의 조급한 생각과 그로 인한 시간에 이끌려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것이 가장 옳다.'라고 여기는 순간 오류를 범한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통용되는 말이지만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이런 수많은 오류를 반복하는 과정에서도 자연은 잠잠히 기다려주기를 멈추지 않는다. 인간인 우리는 스스로에게 세우고 있는 '옳은 기준'들에 대하여 언제나 의심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옳은 것이란 인간의 기대와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문명의 역사일 뿐이다. 어느 때나 생각의 변주를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 사실 내가 온전한 비건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과연 온전한 비건으로 가는 길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내 안에서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비건을 실천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언제나 존경하는 마음을 보낸다.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해 명확한 정답이 나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에 인간이 오늘날의 지구에서 지향해야 할 점이 '비건'이라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단순하게 이 방법만이 옳다는 것에는 아직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고 나는 이런 흐름이 단순히 '요즘 우리에게 유행하는 일'에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건을 실천하는 이유와 타당성,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이 본연으로 나아가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장이 정말 더더욱 많아져야 한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비건은 아니지만 '비건 지향'이다. 내가 추구하는 바는 고기를 구하는 과정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스템을 거슬러 보다 더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기를 너무 싸게, 그리고 쉽게 구할 수 있는 현실은 반드시 부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기를 쉽게 구하기 위해 공장식 사육 시스템을 구축했고 죽기 위해 사는 동물을 그야말로 '생산'해 냈다. 동물은 생명권을 잃었으며 생명으로 존재하는 삶의 모습을 잃었다. 대한민국이 치킨 강국이라는 것은 그만큼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고 있다는 오명이며 치킨을 먹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어렵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생명이란 것은 인간이 창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모든 삶의 과정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꿈꾼다면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생명에게도 그런 삶의 내용은 반드시 필요하고 보호되어야 할 부분이다. 보다 더 먼 미래를 생각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비건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면 자세히 지구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평범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돌아봐야 하는 자세가 아닐까.


시중에는 '동물복지'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사람들이 동물을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한다. 물론 몇 천 원의 차이도 큰 차이이지만 과연 동물복지의 타이틀을 당당히 붙일 만큼 동물복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느 정도에 서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과연 '동물복지'의 기준에 대하여 우리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진지한 논의를 거쳤는지, 동물의 입장과 상황 그리고 삶의 영역에 대해 고려했는가도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마 그렇다면 동물복지의 타이틀을 가지고 '먹을 것'으로 나온 동물들은 지금처럼 저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으로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어 우리가 사는 사회에 계층이 또 나뉘고 빈부격차가 더 확연히 생기며 고기를 먹는 자들과 먹지 못하는 자들의 삶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방향성으로 우리는 이제 진정한 '동물복지'에 대해 논의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치킨 페스티벌과 비건 페스티벌이 동시에 열린다. 재밌는 것은 이 두 축제에 참가를 하거나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묘하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만 같다. 패션도 말투도 심지어 눈빛까지. 어떤 축제가 더 옳고 필요하고 좋은 것인가 단 한 줄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안에 즐기는 사람들의 사연과 모습은 그야말로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축제로 다른 이들의 축제를 파괴하고 있지 않는지, 나의 생명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다른 생명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지 하는 우월감으로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혐오를 또다시 생산하는 누군가로 나는 서 있지 않는지 우리는 돌아봐야 할 것이다. 내가 결국 쓰고자 하는 것은 동물을 위한 글이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을 위한 글이었으면 하는 마음은 아마도 내가 자연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일이며, 그렇기에 내가 비건이거나 비건이 아니거나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야 할 바를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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