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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26. 2023

제 선택은요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서바이벌 음악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쏟아진다. 텔레비전을 켜면 모든 채널에서 노래를 하는 것만 같다. 경쟁이 익숙하고 심지어 경쟁을 너무 좋아하는 우리는 사랑도 경쟁을 해야만 관심을 쏟는다. 경쟁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경쟁이 너무 과열된 양상은 어딘가 좀 불안하다. 이건 경쟁을 떠나 즐기고자 하는 일이라고 해도 경쟁은 경쟁. 치열하다 못해 감정이 극대화되면 결과에 상관없이 경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누구든 눈물이 왈칵 쏟아낸다. 이런 장면들이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같아 보여도 끝내 누군가의 실패를 담은 이 모든 기록에 대하여 어쩐지 이런 세상을 긍정하는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노래가 나오는 모든 장면들이 조금 불편하다. 순수한 가사나 아름다운 음정이 아닌 누군가와의 경쟁이나 돈의 수단으로 전락한 예술이 안타깝고 쓸쓸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예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 나아간다. 경쟁이 없는 곳에서 때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술은 예술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쓴다. 내가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아도, 꼭 그럴 경우가 아니어도 이렇게 살아남아줘서 그렇다.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와 나누고 소통할 때 진짜 온전해지는가를 고민한다. 물론 두 가지 상황 모두 옳다고 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의 글쓰기가 오늘도 현실로 이뤄져야만 이 모든 의견과 생각의 공유가 가능하다는 점. 이 사실 때문에 나는 글쓰기의 갈피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무조건 쓰겠다는 마음을 앞세운다. 경쟁과 선택을 하는 과정은 어느 때나 누군가의 외로움을 딛고 선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고 성공의 사례가 있으면 수많은 실패의 사례들이 있다. 단 하나의 왕관을 한 사람이 거머쥐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삶의 모양을 외면하는가. 나는 경쟁하는 마음에 대한 추적이 우리에게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언젠가부터 이 지구가 인간의 경쟁으로 인해 곳곳에 수많은 존재들을 당연히 외면하게 됐다는 생각 때문이다.


몇 주 전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겔라다개코원숭이는 무리의 온전함과 계승을 위해 왕을 세운다. 수컷들은 암컷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는데 이 전쟁을 위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리 안에서 싸움을 배운다. 넘어지고 쓰러트리고 절벽으로 떨어지면서 자신의 강인함을 키운다. 이 모든 상황을 암컷들은 지켜본다. 어떤 순간은 하늘의 맹수가 무리의 새끼원숭이를 사냥하기 위해 창공을 배회한다. 바로 그때 왕위를 노리고 있는 수컷들의 행동이 중요하다. 얼마나 빠르게 새끼원숭이들을 대피시키느냐, 그리고 이 상황을 무리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느냐에 따라 왕위가 결정될 수 있다. 암컷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단 한 마리만이 무리의 왕이 되는데, 이 왕을 견제하는 수컷들, 즉 다른 세력은 한 마리가 왕위에 오른다고 하여도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때나 왕좌에 오른 그 한 원숭이가 빈틈을 보이면 자신의 존재를 뽐내기 위해 암컷들에게 튼튼한 잇몸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다가 왕좌를 빼앗기 위해 기회를 엿보며 배회했던 어느 수컷의 역습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날에는 온 무리가 혼란에 빠진다. 혼란이 잠잠해지는 날에 새로운 질서가 생긴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사회와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 혼란과 온전해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선택이 필요한 경쟁이 치열해지다가도 정도를 지키고 다시 질서로 돌아오는 것. 모두가 다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동시에 이 무리가 왕좌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원숭이들은 알고 있다. 왕좌에 도전했지만 그곳에 오르지 못한 패자는 다시 한번 도전의 기회를 노린다. 때로는 싸움으로 번지는 그 순간을 치열하게 대면하다가도 싸움이 끝나면 더 이상 욕심을 앞세우지 않는다. 한편 왕좌를 지키기 위한 원숭이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느슨해지곤 한다.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다. 


원숭이들도, 동물의 무리들도 경쟁을 한다. 그러나 경쟁의 결과가 어떠할지라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 그들의 경쟁 규칙이다. 우리의 경쟁과 조금은 다른 지점이다. 이것은 내려놓는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무엇인가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 우리가 경쟁했던 그 지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무엇인가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과열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였다. 어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고 무엇인가를 쟁취해야만 삶이 삶인 것이다,라고 여겼던 모든 삶에 대한 정의는 오류가 있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정의 이전에 이미 아무것도 아닐 수 없다. 우리 개개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애초에 통용될 수 없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동물과의 관계, 나아가 자연과 지구,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 점을 착각하는 것만 같다. 동물을 인간이 소유해야만 한다는 생각, 자연을 뛰어넘어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지구를 넘어 우주에 꼭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삶에 경쟁을 불어넣는다. 지구는 가만히 태양을 돌뿐이다. 


우리가 겔라다개코원숭이처럼 경쟁을 하지만 경쟁을 하지 않았던 모든 날들을 온전하게 보낼 마음과 생각의 자세가 있다면 나는 그 경쟁이 조금은 다양해져도 괜찮다고 본다. 그러나 누군가의 우위에, 관계의 주도에, 상황에 도전하며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심은 앞으로 달리기만 할 뿐이어서 자꾸만 숨이 차오른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현재를 조금 더 진득하게 누려보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본연의 아름다움이 우리가 그동안 사로잡혔던 경쟁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가는 사회와 선택을 하고 받는 사회에 대하여 열광하지 않고 싶다. 만약 그런 현실이란 이미 쏟아진 물이어서 주워 담을 수 없다면 이제 다시 채워질 새로운 물은 조심히, 쏟아지지 않도록 천천히 부어지기를 바란다. 본연의 것을 찾아가는 감수성이란 예술을 예술이라 할 수 있는 초석과 같은 마음이다. 동물 복지와 생명 존중.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와 다시 숨을 쉬어야 하는 지구에 대하여 알리기 위해, 또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실천하기 위해 일단 무엇이든 시작하기를 원했다면 가장 시급히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더 나아지려는 경쟁을 멈춰야 한다. 동글동글 천천히 하루를 꼬박 채우며 돌아가는 지구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오늘 나의 선택에 대해 적는다. 무엇이 되려는 글쓰기가 아닌 그저 나로 쓰는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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