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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24. 2023

포기하고 파멸하기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사람은 추론의 동물이니까. 그러나 앞에 있는 존재를 일종의 자판기라고 여기는 사람은, 굳이 추론 같은 번거로운 사고 노동을 감수하지 않는다. 기계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없다.'

이 문장은 구병모의 소설 <있을 법한 모든 것>에 있다. 소설은 점점 익숙해져만 가는 인간이 없는 인간관계에 대한 단상을 그렸고 그것이 언젠가 무지로 다다르는 길이거나, 노동과 젠더와 생명 등 우리 사회의 다채로운 갈등이 이제는 더 이상 하나의 결론으로 다다를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의도와 방향성을 따라 독자가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 또한 가능한 지점이기에 이번 구병모의 소설도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한 현재의 나에게 온당히 필요한 이야기였다.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를 연재하면서 동물권과 생명존중에 관한 인간의 이해도를 조금 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넓히고 싶은 마음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이 때문일까. 나는 어쩌면 '인간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이 이야기가 동물과 사람의 관계, 즉 생명과 생명의 관계로 확장하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우리의 모든 관계는 서로를 대하고 비출 때 나의 생각의 범위 안에서 이해되는 폭으로 허용하는데 만약 그 허용의 범위를 넓힐 수만 있다면 생각의 확장을 굳이 멈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간과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들의 확장성이 언제나 생명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추론의 동물이다.' 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몇 년 전부터 독서모임을 참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독서모임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많게는 약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함께 같은 작품을 읽는다. 그리고 작품을 해석하거나 자신의 방식대로 분석하고 정리해서 발표한다. 모임을 할 때마다 매 순간 놀라는 것은 생각의 다양성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는 것이고 저마다 다른 생각과 논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을 존중하는 방향성으로 모임이 끝난다는 사실이다. 모임을 하는 우리는 그다음 시간에 함께 나눌 작품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헤어진다. 나의 삶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문학을 통해 치유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결국엔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과정이다. 생각하기를 더디 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다.


추론은 인간이 가진 특권이다. 추론이란 단어를 생각의 힘에 싣는 순간 무엇이든 더 나은 것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다. 이 특권을 가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추론으로부터 얻는 생각의 힘에 따라서 올바른 방향성으로 끊임없이 조율하고 탐구하며 의심하는 자세일 것이다. 내가 인간관계를 떠올릴 수 있는 글을 고 단절된 관계,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의 소통을 고민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 추론의 과정을 올바르게 통용하고 싶었던 마음일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그리고 나는 반드시) 각자의 역할로 (나는 쓰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로 인해해야 할 일들이 창조된다고 믿고 있다. 이루고 싶은 세상에 대해 가야 할 바를 명확히 알고 추론의 힘을 믿으며 올바른 방향성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조금은 더딜지라도 꿈꿨던 세상은 점차 당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추론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서로를 살리는 방향성을 가지고 공생이 실현되는 결론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생명의 존재의식에 대한 추론을 멈추고 공생을 포기하게 된다면 파멸에 이른다. 최근 소들에게 전염되는 '럼피스킨병'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축산 농가의 시스템은 한번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기하급수적으로 전염될 수밖에 없는 환경인 상태가 대부분이다. 빛과 다양한 땅의 환경을 밟고 다양한 맛을 경험이 가능해야만 자연적 면역력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농가에서 자라는 소들은 대부분 태어나고 죽는 순간의 모든 환경이 일괄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전염병에 더욱 취약하다. 물론 그렇게 전염병에 걸린 동물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살처분되거나 방치가 되는 형태로 남는다. 그들에게 권리는 죽을 권리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비인간인 존재들의 삶의 과정을 빼앗아간 현실에서 비인간인 존재인 동물들은 죽을 날들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런 현실에서 이제 우리 인간의 추론은 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정말이지 동물들의 사육 시스템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는 없는 건지, 자본과 수요에 따른 공급을 맞출 것이 아니라 생명존중의 방향성으로 나아가 농가와 동물들의 삶이 온전해지도록 새로운 시스템으로 혁신할 수 없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동물자유연대'에서는 최근 럼피스킨병에 걸린 소들의 실태를 발표했다. 아래 전라남도 여수의 한 농장에서의 사례를 직접 옮긴다.


직접 현장에 방문해 맞닥뜨린 광경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소 40여 마리가 낡은 축사에 살고 있었습니다. 축사에는 오물이 쌓여 있었고, 먹이통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굶주린 소들은 바닥에 떨어진 지푸라기 몇 가닥을 열심히 주워 먹기도 하고, 텅 빈 먹이통을 부질없이 핥기도 했습니다.
동물자유연대가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마침 농장주가 도착했습니다. 그가 시장에서 얻어온 듯한 시든 배추나 채소 줄기 따위를 소들에게 던져주자 굶주렸던 소들이 몰려와 열심히 풀을 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충분치 않아 소들의 짧은 식사 시간은 곧 끝나버렸습니다. 농장주에게 동물자유연대 활동가임을 밝히지 않고 소에 대해 묻자 그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사료를 주지 못한다 답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이 이 상황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현재 전국에는 소 바이러스 질병인 ‘럼피스킨병’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해당 질병은 소에게만 감염되지만, 전파력이 높고 경제성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1종 가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확진된 농가에서는 살처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소들이 아사 직전 수준까지 방치될 정도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방역 차원에서도 문제입니다. 동물자유연대가 여수시에 유선으로 확인한 결과 지자체도 해당 농장의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소와 같은 농장동물은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되지만, 어떤 동물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은 습성에 따라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우리나라 동물보호법 제3조 ‘동물보호의 기본원칙’으로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생존에 필수인 먹고 마시는 행위는 모든 동물에게 보장되어야 할 당연하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출처 : 동물자유연대(@kawa.hq)


경제적인 어려움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간이란 존재는 더 이상 추론할 수 없으며 생각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동물에게 가장 잔혹한 학대는 방임이라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그들의 존재에 대하여 그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행위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동물은 필요한 존재이기 이전에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생의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공생이란 그들의 생에 대해 생각하고 생명권과 삶의 과정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확보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생각은 어떤 지점에 와 있는가. 동물들의 삶에 대하여 통찰하는 사고가 멈춰있다면 인간은 그 어떤 사고도 더 앞으로 나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함께하는 삶에 대한 생각의 포기는 결국 파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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