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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Nov 06. 2023

고양이를 따라가기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그녀는 오늘도 화가 많이 나 있다. 씨발, 씨발을 버릇처럼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향한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그녀의 눈빛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누군가를 찾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사람들과의 경계를 풀지 않는다. 천천히 걷는 것 같으면서도 그녀는 빠르게 걷고 있다. 두 손에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물건을 꼭 고 있다. 아파트 단지 끝에 있는 인적이 드문 산책길. 그 끝에 그녀가 섰다. 허리를 숙이고 나무 가지 사이로 들어간다. 무릎이 땅에 닿는 것도 거침이 없다. 여전히 그녀는 씨발씨발 한다.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꺼낸다. 누군가 버려놓은 듯한 플라스틱 그릇이다. 그녀는 손에 있던 냄새나는 무엇인가를 그릇에 쏟아붓는다. 한 그릇이 채워졌다. 그녀는 조금 뒤로 물러서더니 허리를 폈다. 다시 주변을 살폈다. 나는 그녀의 뒤에 서 있다. 그녀가 아직 나를 발견하지는 못한 듯하다. 그녀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비닐봉지에 있는 것들을 한 줌 크게 집더니 플라스틱 그릇에 골고루 나누어 담는다. 다시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간다. 몇 번이고 주변을 맴돌았던 그녀는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됐는지 그제야 한숨을 쉰다. 다시 중얼거린다. 씨발씨발.


나는 무슨 끌림이었는지 반나절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게 되면 욕샤워를 하게 될 거라는 예상을 하면서도 그녀가 가려는 곳이 궁금했다. 나와 고동이가 자주 다니는 동네 산책길에서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된 건 약 1년 전이었던 것 같다. 늦은 밤 산책길. 그녀는 아파트 둘레길 끝지점, 또는 인적이 드문 장소, 놀이터 바로 앞 관리되어 있지 않은 나무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녀는 우리 아파트 주변에서 살고 있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고양이들은 밥을 먹다가도 나와 고동이가 근처를 지나다닐 때면 빠르게 피했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한 날엔 고동이도 긴장상태, 고양이들은 겁에 질린 상태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있으면 달랐다. 고동이가 그 옆을 지나가도 경계하는 모습이지만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고양이들에게 그녀가 옆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고양이들과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혹시 말을 걸어오면 어쩌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러다가 누군가와 말을 하게 되면 자리를 피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여름날이었다. 며칠 동안 비가 쏟아졌다. 나는 고동이와 산책을 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고동이는 내 품에서 비가 내리는 냄새를 열심히 맡고 있었다. 나는 비 오는 날의 그녀가 궁금했다. 그녀가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녀는 고양이들의 밥그릇을 확인하고 있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우산도 쓰지 않았고 플라스틱 밥그릇을 만지작 거리며 슬픈 목소리로 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나는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말했다. '아주머니 오늘도 나오셨네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의 우산을 확인했다. 눈을 위로 올리면서 내 품에 있었던 고동이를 발견했다. '아기가 예쁘네, 버리지 마요.' 그녀의 말이었다. 갑자기 버리지 말라니. 이제 욕을 하려나 싶었는데,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갈 길을 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내리는 비처럼 어딘가로 내려가는 듯했다.


긴 장마가 개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높은 하늘이 보였다. 끝없는 하늘은 나의 욕심과 같았다. 고난의 때를 알지 못하고 어려운 순간을 망각한 알량한 사람의 마음처럼 하늘은 또다시 푸르고 맑았다. 나의 나 된 모습을 알아차리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고동이와 산책을 하는 것이다. 매일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일은 내가 더 새로운 인생으로 누군가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곤 한다. 그저 걷는 것만이, 생명으로 존재하는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그 어떤 욕망과도 바꾸거나 견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임을 깨닫게 한다. 고동이의 발걸음이 가벼울 땐 나의 욕심도 가벼워진다. 고동이가 가던 길을 잠시 멈출 땐 나도 가던 길을 멈춘다. 나의 에너지가 아직 더 많이 남아있음과 상관없이 그저 멈춰야 할 곳이어서, 냄새를 맡고 세상을 알아가야 하고, 주변을 돌아봐야 하기 때문에 오늘 비로소 멈추는 것. 이렇게 멈춰야 할 때임을 알게 된다. 그때였다.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일을 하고 있었다. 높은 하늘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표정도 한 결 편안해 보였다, 혹시 나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는 친근감에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오늘도 나오셨네요. 덕분에 우리 동네 고양이들이 건강한 것 같아요.' 그녀는 나의 목소리에 허리를 폈다. 고동이와 함께 조금 걷기를 원하는 것 같았고 우리는 꽤 먼 거리를 함께 걸었다.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수많은 이야기의 결론은 이랬다. 인간은 어려움이 있으면 나라의 도움도 받고 스스로 자신의 아픔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지만 동물들은 오직 인간의 보살핌과 관심이 없으면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세상은 너무도 쉽게 만들어지지만 동물을 위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는 현실이 너무도 슬프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욕을 하는 이유는 이 슬픔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굽혀 길고양이들의 삶을 오래도록 지켜본 그녀는 고양이들과 같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누리고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은 그녀와 닮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그녀와 닮은 삶을 살아가야 했다. 때론 그녀도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원했다. 그저 이런 삶도 있구나라고 누군가에게, 어디서라도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했었다. 그동안 방법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그러다가 낮고 낮아진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고양이들이 보였다.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원했던 고양이들처럼, 그저 안전하기만을 원했던 그들처럼 그녀는 스스로 고양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세상은 왜 이럴까. 수없이 생각했던 의문이다. 이런 의문이 쌓여 갈수록 그녀는 욕을 반복하게 됐고 사람과의 대화가 쉽지 않아 졌다. 나와 고동이를 본 순간 그녀는 고동이에게는 문제가 없어 보였던 거다. 고동이는 나를 버릴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사람으로 생긴 내 모습이 그녀에게는 온통 불안의 존재였다. 나는 고동이를 버릴 수도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녀다. 그래서 뜬금없게도 나에게 고동이를 버리지 말라고 했었던 거다. 나는 말했다. 그럴 순 없다고 말이다. 나에게도 고동이가 너무 큰 존재라고 말이다. 그 이후 고동이와의 산책길에 그녀를 만나면 무슨 일인지 반갑게 인사한다. 그녀는 내가 고양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편하다고 했지만 나는 속으로 달리 생각했다. 고양이들이 아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녀가 했던 말이 내 생각과 거의 비슷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이 고양이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녀가 가는 곳이 고양이들이 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안녕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나는 고양이들의 안녕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매일 이 길을 반복해서 걷는 이유는 고양이들 때문이 아니라 결국에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이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들에게 그녀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그녀에게 고양이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디에선가 누구에게 그녀가 반드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고동이에게 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슬픔. 그 이상의 세상이다. 내가 이를 확신하는 이유는 나 역시 고동이가 없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그렇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너, 너를 위해 존재하는 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간다. 이 공생을 알아차리기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소중한 생명을 떠나보낸 후에야 알아차리기도 한다. 우리는 존재로 확인받을 수 있는 존재됨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어떤 생명보다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 생명으로 존재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은 반드시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눈에 자꾸 보인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 어떤 혐오도 조장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존재이거나, 골칫거리가 될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저 인간이 인간됨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늘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런 존재로 어떤 모습으로든 발휘되기를 원할 뿐이다. 내가 만났던 그녀가 택한 삶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녀가 고양이들에게 느끼는 연민과 슬픔의 의미 그 넘어가 분명 있다고 믿는다. 이로써 출발하는 돌봄의 과정보다 더 필요한 것은 생명 대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여기고 싶다.


고양이의 슬픔까지도 알아차리는 이들이 사람의 슬픔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고양이가 가야 할 곳, 그들이 편히 자리를 잡고 누울 수 있는 곳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고양이를 위한 일인 듯 보이지만 결국에 사람을 위한 일이다. 외로운 이들을 버려두지 않는 세상. 홀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 않는 세상. 우리가 이 세상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손가락질과 원망을 멈추고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아라.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하늘이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지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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