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그는 낙타의 주인이다. 그의 옆에 있었던 약 세 마리의 낙타는 자신보다 작은 한 사람의 손짓에 방향을 튼다. 사막 한가운데 놓여있는 낙타들은 태울 손님들을 기다린다. 아주 오래전 자신의 조상들이 사막을 지났던 사명을 기억하듯, 그들은 비슷한 모습을 취한다.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생각한다. 낙타의 주인이라 말하는 그는 그의 낙타들을 줄지어 세운다. 낙타만의 고유한 등곡선을 화려한 천으로 가린다. 어떤 손님들은 이 등을 무서워한다는 이유에서다. 요즘은 비수기라 그래도 낙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한창 때는 온종일 사람을 태우고 드넓은 사막을 걷고 또 걷는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바퀴를 돌면 된다. 우리 돈으로 약 5만 원. 누군가는 비싸다며 흥정을 한다. 낙타 위에 올라탈 때까지 5만 원, 4만 원, 때론 3만 원. 정해진 바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낙타는 사람의 무게가 느껴지면 돌고 돈다.
낙타를 만난 건 남편과 함께 호주를 여행했을 때다. 우리는 시드니 외각으로 나가 호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당일 투어를 신청했는데, 그중 도심과 멀지 않은 곳에 사막이 있었고 사막에서 모래 썰매를 타거나 낙타를 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남편은 나에게 묻지도 않고 모래 썰매를 신청했다. 내가 언젠가 동물에게 올라타는 인간의 문명에 대해 극도로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분명히 인간과 다른 신체 구조를 지니고 있고 인간과 공생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동물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순리일 수 있으나 지금은 인간이 이를 너무 악용하고 있고, 필요 이상으로 동물이 노동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현실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끝에는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알았던 남편은 화를 내는 내 모습도 싫고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도 싫기에 동물 이야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동물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바람에 남편은 늘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나를 만난다. 남편은 가끔 나를 다른 생각으로 환기시켜 주려 애를 쓴다. 그런데 하필 그날 호주의 사막에서 낙타를 보게 될 줄이야. 남편은 내가 낙타를 보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했다. 모래 썰매를 타러 가는 길. 자연스럽게 낙타들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곧장 낙타들에게로 다가갔다. 낙타의 눈빛을 보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앉았던 등을 보았다. 화려한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고유한 빛깔은 가릴 수 없었다. 그때 낙타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내가 낙타의 주위에서 계속 맴돌며 그들을 관찰하고 있으니 주인은 이제 그럼 낙타를 탈 것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낙타를 타지 않겠다고 했고 낙타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낙타 주인은 내 말을 이상하게 알아차렸다. '낙타는 이상하지 않다. 안전하다. 배고프지 않다. 충분히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말했다. 낙타가 건강하길 바란다는 나의 관점에 대해 그는 다르게 해석했던 거다. 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나는 낙타와 눈인사를 나누고 모래썰매장으로 갔다. 모래 썰매를 타기 위해서는 모래 언덕을 한 걸음씩 밟고 직접 올라야 하는데, 푹푹 꺼지는 발 때문에 평범한 언덕을 오르는 것보다 몇 배로 힘이 든다. 그렇게 썰매를 탈 수 있는 지점에 이르면 꽤 높은 경사가 아찔하면서도 신비롭다. 한 번 크게 숨을 쉬고 저 먼 끝지점에 닿아있는 모래와 하늘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무엇인가 분명히 있지만 그 끝에 가야만 알 수 있는 그곳이 보인다. 천천히 걷다 보면 도착할 그곳이지만 발길을 내딛지 않으면 평생 갈 수 없는 그 어느 지점이 보인다. 나는 그 지평선에 눈을 떼지 않고 썰매를 타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먼저 내려간 남편은 조심하라고 소리친다. 모래를 손으로 밀어내며 썰매가 앞으로 가도록 한다. 속도가 붙는다. 밑으로 슝... 내가 지나온 자리에 모래 흔적이 남는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올라간 것에 비해 너무 순식간에 내려왔다. 조금 허무하기도 하지만 나는 올라간 그 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사막의 지평선을 다시 보기 위해 모래 언덕을 다시 올랐다. 그리고 다시 고요한 사막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을 느꼈다. 저 먼 곳에 분명히 있지만 아직 닿지 않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오늘날 여전히 동물을 인간의 도구로 전락시킨 관광 산업의 실태를 만난다. 실제로 내가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 지역의 유서 깊은 공원에는 여전히 꽃마차를 끄는 말이 존재한다. 가끔 그곳을 지나가면 말은 자동차를 사이를 피해 걷고 있고 마차 안에는 남녀노소 불문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마차 위에 올라타 있다. 마차에 탄 사람들은 말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말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도 없다. 화려한 꽃마차를 짊어진 말은 스스로의 생을 꽃마차 주인에게 맡겼을 뿐이다. 평생을 노역하고 매일 같은 자리를 돌고 돌았던 대가에 대해서 기대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마차로 태웠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본 적도 없다. 꽃마차를 끄는 말은 인간의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꽃마차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인정에 대해 평가를 하거나 그가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꽃마차의 주인이나 꽃마차를 타려는 사람이나 이를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향해 과연 동물이 인간의 도구로 여전히 살아가는 현실에 대하여,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지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어쩌면 꽃마차의 주인은 그 마차를 끄는 말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가 노동하는 현실에 대해 녹록지 않게 생각하는 만큼 그가 물건으로 소유하고 있는 말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생과 말의 생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말과 동일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이 말을 잘 알고 있다는 합리화가 그와 그의 말이 여전히 공원으로 돈벌이를 하러 오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에는 오류가 있다. 말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 공원을 돌고 돌았지만 내일 아침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여전히 이 공원을 돌고 돌 거라는 안정적인 바람은 말에게 있지 않고 말의 주인에게 있다. 말은 자신의 생과 건강, 가야 할 바, 그리고 죽음까지도 한 사람에게 내 맡겼을 뿐. 그 어떤 자유를 꿈꿔본 적이 없다. 이쯤이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돌고 도는 인생에 대해 모두가 다 동의하는 입장이라면 한 생명의 돌고 도는 인생에 대하여 그 누가 온전하게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꽃마차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생에 대하여 평가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꽃마차의 주인도 한 생명에 대하여 노역의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는 현실을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저 먼 나라 호주의 어느 사막에서 낙타로 살아가지 못하는 낙타에게 화려한 천을 씌우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