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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Nov 16. 2023

살리는 문학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 들어가는 말

'놀라운 건 바로 이 성실함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거다. 과거의 우리, 미래의 우리가 아닌, 바로 오늘의 우리가 사는 원동력은 서로의 성실함이다.' - <읽기의 의미> 중에서


지난 7월 내가 세상에 출간한 <읽기의 의미> 속에 담긴 문장이다. 나는 이 성실함에 대해 찬양하면서도 자주 회의감을 느낀다. 이토록 간결한 단어가 누군가의 삶을 담아내고 있음이 분명하면서도 이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단어로 성실함을 표현할 만한 다른 단어가 없음에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성실함뿐만이 아니라 사랑 또한 그렇다. 미움이나 질투 등 사람의 감정이나 행동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행위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아 성실함을 말하는 소설을 탄생시키기도 하고 사랑을 말하는 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공감대가 어떤 작품을 통해 형성되면 그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에 오래도록 남는 소위 '인생작'이 되기도 한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나의 한계를 이토록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아름답게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며 세상에서 마주한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이 문학으로 대부분 치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시점부터 내가 향유하는 문학의 필요성에 대하여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의 오늘을 살게 한 힘이 문학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로 뻗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학이 나를 살렸다면 타인의 삶도,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생명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나는 '살리는 문학'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타인의 성실함이 언제나 나의 성실함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처럼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과정을 시대에 존재하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과정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를테면 반려견을 키우는 내가 개를 이해하기 위해서 보이는 길이 아닌 냄새로 알아차릴 수 있는 길을 이해한다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인데, 인간의 선천적 신체 구조상 이는 어떻게도 이르지 못하니 이를 글로 배우는 거다. 물론 저명한 훈련사나 수의사의 강연이나 영상으로도 이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책을 통해 한 문장씩 곱씹어가며 이를 체득하는 것은 조금 더 천천히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면 우리 집 반려견 고동이는 내가 책을 다 읽는 순간을 기다려주는데 내 옆에서 가만히 자는 것 같다가도 작은 인기척에 다시 고개를 드는 것 보면 깊이 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내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린 것이 분명하다. 나는 고동이를 포함한 동물을 이해하는 과정을 성실함으로 다가가며 크고 작은 결론들에 도달하는데 완벽한 결론에 다다르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을 이해하고 즐기면서 충분한 만족감을 얻는다. 나는 이것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언제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작품을 펼치지 않으면 즉. 문학작품을 읽지 않으면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일이기에 어느 때는 움직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안타까움을 표현하곤 한다.


'살리는 문학'은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르포와 칼럼으로 저명한 장뤽 포르케는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이라는 우화를 통해 동물들이 인간과 인간의 세상을 인식하고 있는 바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인간이 동물에 대해 생각하는 인식에 대한 한계점을 우화를 통해 언급하며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지협적인지 알아라치리게 한다. 나는 이 작품을 대하며 인간의 무지함에 대해 한탄하다가도 결국엔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동물의 살 길이 안전하게 보장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대해 인정하게 됐다. 새들이 넓은 창공 위를 하염없이 날아다니는 사소한 행위부터 무한하게 개체수가 늘어날 거라는 의미 없는 걱정으로 생겨난 멧돼지 사냥의 정당성과 같은 것들이 오늘날 다양한 환경 문제점으로 뻗어 나간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우화는 이것이 모두 인간으로부터 발현된 현실임을 인지할 때 자연의 안정적인 질서가 비로소 확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키를 갖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해 왔기에 지금도 여전히 아무것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지경에 머물러 있다.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때 성실함을 발휘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나는 이런 목소리가 조금씩 우리 주변에서 더 크게, 더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사실을 외면하느냐 이제부터 조금씩 인지할 것이냐 하는 부분이 각 개인이 알아차려야 하는 영역으로만 남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진짜 해야 할 일들과 지금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하여 정부의 규제나 사회적 합의 등이 우리 사회에서 조금 더 치열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특정 계층이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에게 동물이나 환경의 문제들이 크게 와닿지 않는 현실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리는 문학을 읽고 향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맥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지금 당장의 책을 출간하는 것이 옳은 해답일까, 어딘가에 한 번 읽고 버려질 글을 끊임없이 연재하는 일들이 도움이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유행하는 숏폼을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인식이 무엇인지 나만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효과적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당장의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내가 읽었던 문학이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나의 개인적인 삶 속에 가 닿았던 진한 울림을 잊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도 나에게 다가온 작품이 있다. 최은미 소설가의 <그곳>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겉으로 보기에 개인적이고 단절된 것 같아도 실은 사람들 사이에 연대와 유대가 언제나 잠재되어 있음을 드러내'라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이지은 평론가의 말처럼 우리 안에는 문학을 향유하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생명으로 동일한 존재들에 대한 단상'을 우리는 어느 때나 아낌없이 꺼내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음을 확신한다. 그동안 방구석에서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원망하고 있기만 하던 나에게 문학은 말했다. 언제나 내가 찬양하고 있었던 그 성실함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성실함과 손을 잡으라고 말이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성실함을 꺼내 작은 생명을 살리는 방향성으로 세상이 기울일 수만 있다면 나는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라지고 말면 그뿐인 내 생이 언제까지나 자랑하고 싶은 문학이 아니라 살리는 문학을 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길을 함께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충분하다. 나와 다른 생, 우리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에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엔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과정이 즐겁기를 그것이 결국에 한 생이 살아가는 의미가 되기를 바란다. 인간의 발자취가 아닌 자연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를 읽으며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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