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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young Jun 13. 2024

가자! 제주로

그 길로 가다 보면 언젠가 그곳에 가 있다.

"우리 제주로 이사 가자"

두 아이의 잠자리 독서로 '모모'를 읽어주고 있을 때였다. 퇴근하고 온 남편의 상기된 목소리였다. 마침 모모에서 회색신사가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었고, 타이밍이 꽤 절묘했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 중에서-


남편의 직업은 데이터사이언티스트이다. 데이터 분석이 각광을 받는 시대에 살다 보니 운이 좋게도 여러 곳에서 취업 제의가 왔었다. 아이들이 넓은 세상에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우리는 해외로의 이주를 원했다. 하지만 해외로 가기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우선 연로한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연봉과 아이들 국제학교, 거주비 등을 저울질하면 포기할 것들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제주에 있는 스타트업에서 꽤 좋은 조건을 제시한 거였다.


우리는 해외살이만큼이나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둘 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데다가, 둘 다 그 흔한 시골에 사는 조부모님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이들을 시골에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 몫했다.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도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가서 만날 수가 없는 게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의 삶이다. 사교육을 거의 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은 매일 친구 찾아 이 놀이터, 저 놀이터를 헤매고 다니는 게 일과였다. 결이 맞는 친구들과 자주 놀았지만 엄마들은 농담처럼 '언제까지 이렇게 놀게 할 거냐'며 서로 묻곤 했다. 사실 가만히 있다가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떠밀려 살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제주에 여행을 올 때마다 '여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매 번 했고, 우연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때면 '내 아이들도 이곳에서 자라면 좋겠다.' 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게다가 시골 중에서도 에메랄드빛 바다가 있는 제주라면? 바다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게를 잡고, 파도타기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제주에 있는 스타트업에서 제시한 조건은 가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집에서 살 수 없다는 게 큰 고민의 요소가 될 만큼) 첫 내집마련으로 애착이 강했던 아파트는 전세를 내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새 주인을 찾았다. 덤으로 매 달 갚던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도 안녕이다. 그렇게 제주로 가자는 남편의 말을 들은 지 3개월 만에 우리 가족은 제주에 살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마지막 아파트 산책
제주 이주를 응원하는 고마운 마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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