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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노랑 Apr 03. 2024

야구#1. 경상도 아빠가 롯데팬에서 엘지팬이 된 사연

고향도 막을 수 없는 딸 사랑

2023 한국시리즈

이제 서울에 산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나의 고향은 경상남도다. 여전히 부모님은 고향에 살고 계신다. 아빠가 젊었던 시절엔 아직 NC다이노스라는 구단은 없었고 부산/경남 하면 롯데자이언츠가 정체성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아빠는 롯데팬이다.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퇴근 후 경기를 챙겨보며 나름 소소한 취미생활로 즐기는 스타일이다. 그런 아빠를 보면서 어렸을 때는 왜 저렇게 길고 긴 경기를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축구는 전반 45분, 후반 45분 깔끔하게 끝나는데 이 놈의 야구는 어쩜 9회 말까지 있는지 당최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은 TV 주도권이 아빠에게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걸 못 보게 하는 야구가 미웠다.


그러던 내가 17년도 LG전자 입사와 함께 LG트윈스 팬이 되었다. 신입사원 시절, 팀원들과 다 같이 놀러 간 잠실 야구장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정말 야구 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계속 옆자리 선배에게 '저게 왜 스트라이크예요?', '볼이 뭔데요?', '저 사람 갑자기 왜 나가요?' 등등.. 폭풍 질문을 쏟아부었다. 다행히 야구에 진심이었던 그 선배 덕분에 첫 직관동안 살아있는 야구 특강을 들을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끝내기 안타라는 짜릿한 순간을 마주하며 야구의 세계로 본격 입문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 선배와 친하게 지내는데 내가 야구 좋아하는 걸 보면 항상 그때 얘길 한다. 아무것도 모르더니 어느새 이렇게 야친자가 되었다고.)


나 또한 아빠가 했던 것처럼 퇴근 후엔 항상 야구를 틀어뒀고 회사에서 나오는 계열사 티켓으로 1년에 10번 이상 직관을 다녔다. 심지어 어린이날 선물로 엄마아빠한테 유니폼을 사달라고 협박하여 유니폼 선물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유니폼, 유광 점퍼, 머리띠, 응원수건, 응원봉에 깃발까지 풀세트로 갖추며 진정한 야구 광인으로 거듭났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야구를 보고 있던 와중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구 보고 있냐며. 그날은 롯데 vs LG 경기도 아니었는데 아빠가 술술 LG 경기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아빠 왜 LG경기 보고 있냐고 되물었더니 아빠가 말했다.


"아빠 이제부터 엘지팬이다."


그 말에서 대학에 입학한 20살부터 떨어져 살아온 딸을 향한 진한 그리움과 애정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아빠는 원래 소문난 딸바보라 늘 아침마다 모닝 카톡을 하고 점심시간마다 전화를 한다. 하지만 같이 살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대화 소재는 '밥 먹었나?' 정도이고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통화가 길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새롭게 생긴 딸의 취미가 아빠에겐 얼마나 반가웠을까. 심지어 월요일 빼고는 매일 공유할 수 있는 취미라니. 그렇게 우리는 야구를 매개체로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어느덧 나도 8년 차 LG트윈스 팬이다. 이제 오랜만에 본가에 가서도 함께 야구를 보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눈다. LG트윈스 공격 차례가 오면 나는 대뜸 소파에서 일어나 각 타자의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빠는 시끄럽고 정신 사납다며 제발 좀 앉으라고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얼굴은 웃고 있는 걸 보면 서른 넘은 딸의 재롱이 재밌긴 한 것 같다.


오늘도 아빠와 나는 여전히 야구 얘기를 한다. 병살이나 잔루로 답답한 상황일 때도, 역전 홈런의 흥분되는 상황일 때도, 여하튼 여러 의미로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일 때 서로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야구 보고 있나? 방금 봤나?!"

"와, 임마 와이리 못하노 오늘?!"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나누는 서울 야구팀에 관한 대화가 가끔 웃길 때도 있다. 하지만 국경을 초월한 사랑처럼 딸내미를 향한 사랑은 고향도 막을 수가 없다. 


카카오톡 이모티콘도 LG트윈스 이모티콘을 쓰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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