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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진 Nov 15. 2024

다른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

<다른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 다른 사람을 위해 흘린 눈물은 아름답다. 겉으로 흘린 눈물도, 마음속의 웅덩이를 만드는 눈물도.


-언니는 병원 실습 돌다가 울어본 적 있어요?

-운 적? 글쎄. 내 잘못도 아닌데 억울하게 혼나거나 밤을 새워 과제를 할 때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찔끔 난 적은 있어.

-그런 거 말고, 환자를 보고 울어본 적 있냐는 말이었어요.

-아! 그랬구나. 음… 아직 없는 것 같아.


같은 과 후배들을 만나면 의외로 어색하고 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고향이 어디니, 동아리는 뭐 하니, 학교생활은 재밌니 등 진부한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금세 이야기 소재가 동난다. 그럴 땐 ‘학교 생활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라는 무책임한 말로 대화의 주도권을 떠넘겨 버리곤 한다. 그러면 후배들은 딱히 궁금한 게 없으면서도 아무 질문이나 쥐어짜 내려 애를 쓴다. 의미 없는 질문에 의미 없는 대답을 해 줄 준비를 한 나에게, 어떤 후배의 ‘병원에서 울어본 적이 있냐’는 질문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기쁨, 슬픔, 공포, 억울함, 분노 등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다양하다. 후배는 슬픔과 공감의 눈물을 흘린 경험에 대해 물었지만 분노와 짜증의 눈물로 잘못 이해해 버린 나는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후배의 정정에 태연한 척 다시 대답해 줬지만 내심 부끄러웠다. 그렇다. 안타깝게도 나는 환자를 위해 울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뭘까? 내가 요즘 흔히 말하는 MBTI ‘T’, 지독하게 이성적인 사람이라 공감을 잘 못 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난 슬픈 영화를 볼 때는 종종 눈물을 흘린다. 슬픈 장면에서도, 감동적이고 벅찬 장면에서도 주인공의 감정을 생각하며 따라서 울곤 한다. 게다가 한 때는 생뚱맞게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육아 예능을 보면서 매주 눈물을 쏟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은 아주 작은 위기에도 펑펑 울어 버린다. 한 입 맛본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트린다든가, 동생에게 장난감을 뺏긴다든가 어른들이 보기엔 사소한 일도 당사자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을 것이다. 내가 가장 많이 운 장면은 한 아이가 영어 유치원 첫 등원 날 가기 싫다고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장면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편안한 집에서 익숙한 부모님과 함께 보냈던 아이에게, 처음 보는 아이들이 가득하고 시퍼런 눈동자의 외국인 선생님이 뜻 모를 외계어로 말하는 영어 유치원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일은 아이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직면한 큰 위기였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 아이는 앞으로 학교에 가기 싫어서, 어색한 모임에 나가기 싫어서, 직장에 가기 싫어서 괴로워할 것이다. 인생을 웃음만으로 가득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어른이 된다. 어떤 천진난만한 아이든 언젠가는 이 잔인한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 나에겐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프다.


이렇게 눈물이 헤픈 내가 병원에선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고 울 때와 비슷한 맥락으로 소아과 실습을 돌 때 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소아과는 병원 실습 중 심적으로 가장 힘든 과였다. 소아과에 장기 입원하는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과는 표정 자체가 다르다. 보통 초등학교 입학 전의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얼굴에 웃음과 장난기가 스며 있다. 벌겋게 상기된 볼, 움찔움찔 올라가는 입꼬리, 장난칠 궁리에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 하지만 신체적 고통과 반복되는 입원에 익숙해진 소아과의 아이들은 웃지 않는다. 머리맡에 죽음을 두고 잠드는 아이들은 무기력함에 잠식되어 있고, 웬만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보다도 공허한 무표정만을 고수한다. 가끔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재밌는 얘기를 해주는 의사나 간호사를 바라보며 노력이 가상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어줄 뿐이다.


난 그런 아이들을 위해 ‘함부로’ 울어줄 수가 없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나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이들은 내가 평생 만날 일이 없다. 난 화면 너머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며 마음대로 그들의 감정을 정의 내리고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병원의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생에 행복한 일만 있는 게 아니란 걸 누구나 언젠간 깨닫게 되지만, 이 아이들은 너무 일찍 그 사실을 알아 버렸다. 그들의 감정을 예측하는 것도, 되지도 않는 희망의 말을 건네는 것도 건방지다. 제삼자인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고 울어줄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단 한 가지, 기적 따윈 없다 해도 마음속 간절히 기적을 바라는 것이다. 눈물은 흘리지 못해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행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기쁨의 순간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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