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울새 Mar 04. 2023

딸기 땅콩 마들렌

2023년 2월 넷째 주의 마들렌

열이 났다.


간밤에 몸이 조금 처지는가 싶더니, 밤새 오한이 들었다. 평소에 비해서는 가벼운 오한이었기에 그저 밤새 지나가는 증상인 줄 알았는데, 아침에도 여전히 뜨끈한 열이 온몸에 남아있었다.


하루 종일 내리지 않던 열은 한밤이 되어서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는데, 보통 한 번 열이 나면 며칠간은 해 질 때쯤 열이 다시 슬금슬금 오르는 게 나의 일반적인 패턴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며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누워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요즈음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어서, 겨우내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환절기가 찾아오자마자 이렇게 몸이 삐그덕거리는 걸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병이란 건 나의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개인의 의지가 회복에 큰 영향을 주고 빠른 회복을 돕기도 하겠지만, 결국 아플 만큼 아프고 나야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으려는 노력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아직 나아야 할 때가 오지 않은 것뿐이니 너무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몇 년 전, 지방에 내려와 투병을 시작하고 이삼 년쯤 흘렀을 무렵 친척 중 한 분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으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그분 입장에서는 조금 더 힘을 내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다 보니 나온 말씀인 것 같아서 말없이 웃음 짓고 흘려버렸지만, 사실 인생에는 때때로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으론 이겨낼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볼 만큼 성공한 유명인들이 강인한 의지와 충분한 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병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저 떠나갈 때가 찾아온 것일 뿐이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나의 탓이나 남의 탓을 하지 않고 괜히 신을 걸고넘어졌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그저 환절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몸이 안 좋을 수밖에 없는 때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면서, 노곤하게 익어 살짝 늘어진 찹쌀떡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한 주를 보냈다.


한 주 동안 좀처럼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 마들렌 작업도 한없이 미뤄두었더니 조금씩 초조한 마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어머니께서 새로 사 오신 딸기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몇 주 전부터 딸기를 이용한 마들렌을 한 번 더 만들고 싶었는데, 다른 재료들에 밀리거나 사용할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올해는 더 이상 딸기를 사용한 마들렌을 만들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못내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딱 맞는 때가 찾아왔으니 세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오늘은 딸기 땅콩 마들렌을 만들었다.


몇 주 전 깻잎과 딸기를 이용해서 마들렌을 만들 때는, 작은 딸기를 원형으로 잘라서 건조한 뒤 마들렌에 올리면 작은 물방울무늬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문에 다시 한번 딸기 마들렌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구매해 둔 딸기는 평균적인 크기가 최소 탁구공만 해서 계획대로 작은 물방울무늬를 만들 수가 없었다.



결국 두툼하게 저며 적당히 건조한 뒤 삼각형 모양으로 잘라서 마들렌에 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대신 향이 워낙 풍부하다 보니 건조한 뒤에도 향이 가득한 데다 조직감도 좋아서, 건조한 딸기의 일부를 마들렌 반죽에 섞기로 했다.


마침 집에 남은 땅콩이 있어서 직접 만든 땅콩버터도 마들렌 반죽에 함께 섞어주었는데, 딸기는 익을수록 캐러멜 향을 내는 화합물인 푸라네올의 농도가 증가하기 때문에 보통 캐러멜 향을 지닌 재료들과 좋은 조화를 이루는 편이라, 마들렌의 풍미를 좀 더 다각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조한 딸기를 마들렌 반죽에 섞은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적당히 말라서 꾸덕꾸덕해진 딸기가 부드러운 마들렌 반죽과 만나서 자칫 텁텁하게 느껴질 수 있는 땅콩의 맛을 상큼하게 중화시켜 주었고, 딸기의 향긋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고소한 땅콩버터의 향과 기분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반면, 껍질 쪽에 배치한 딸기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높은 열 때문에 겉이 타버려서 쓴맛이 느껴졌고, 배꼽 쪽의 딸기도 작은 조각들은 그을려서 생각만큼 인상적인 외형을 완성하지 못해 아쉬웠다.


다음에는 껍질 쪽 딸기는 제거하고, 배꼽 쪽엔 수분감을 적당히 조절하며 말린 딸기를 배치해서 좀 더 만족스러운 딸기 마들렌을 만들어 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염소치즈 마들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