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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울새 Mar 02. 2023

흑토끼 당근 마들렌

2023년 1월 셋째 주의 마들렌

낮잠을 잤다.


요즘은 아침을 먹고 곧바로 아침 운동을 하는데, 그 직후엔 잠이 드는 경우가 많다. 몸 상태가 나름 괜찮아서 수면의 질이 비교적 나쁘진 않지만, 잠을 자도 몸의 피곤함이 온전히 해소되지 않는 편이라 아침 운동 후에는 급격히 지치기 때문이다.


물론, 본격적으로 잠이 드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서 아무리 깊게 잠들어도 2시간을 넘지 않고, 보통 2시간을 잤다고 해도 계속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하다가 잠깐잠깐 잠드는 시간이 2시간 정도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침 시간에는 무얼 하든 좀처럼 정신이 없는 편인데, 며칠 전에는 정말 밤잠을 자듯 4시간 정도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난 직후 순간 아침인가 착각할 정도로 깊이 잠들었는데, 깨어날 무렵 한 가지 끔찍한 꿈을 꿨다. 좀처럼 다 같이 모이는 일이 없는 친척 어른들이 한자리에 모여 계시길래 무슨 일이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한 분이 침통한 표정으로 어머니께서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십수 년 전, 지금 앓고 있는 지병의 확진 판정을 받은 이후 어머니와 나의 관계에서 환자는 언제나 나였는데,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가 환자의 위치에 선 순간 말로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절망적인 기분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그저 눈물이 났고, 그야말로 눈이 짓무르도록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먹먹한 기분으로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는 말을 연신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부엌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점심 준비를 하시는 어머니를 말없이 멈춰 세워 그저 꼭 안아드렸다. 민족의 명절인 설을 맞아 나의 가장 가까운 조상이며 나의 가장 가까운 친척 어르신인 어머니께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설에는 역시 어머니를 위한 디저트를 따로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올해는 예년보다 설 연휴가 빠르다. 윤달이 있는 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달력은 태양력을 따르지만, 설날은 태음력에 따라 날짜가 정해진다.


태양력을 기준으로 1년은 365일인데, 실제로는 태양력과 태음력 모두 1년이 정확히 365일로 딱 떨어지진 않는다. 그 때문에 오차를 수정하기 위해 윤일과 윤달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태양력은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윤년에 2월 29일을 윤일로 끼워 넣어 예년보다 하루를 더한 366일을 1년으로 계산하고, 태음력은 2~3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윤년에 윤달을 끼워 넣어 1년을 13개월로 계산하여 오차를 수정한다. 보통 태음력의 윤년에는 설날이 예년에 비해 빠르다.


안 그래도 새해를 맞아 다들 의욕이 넘치는 분위기인 데다 설날까지 조금 이르다 보니 묘하게 급한 마음이 들었는데, 어머니의 꿈을 꾸고 난 이후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서 샘솟는 욕심을 걷어내고 집에 있는 재료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만들 수 있을 만한 마들렌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늘은 흑토끼 당근 마들렌을 만들었다.


사실 이번 마들렌은 외형이 중요했지만, 답은 되레 외형의 고민 끝에 재료의 조합에서 찾았다. 우선 집에 흑토끼를 표현할만한 재료가 흑임자밖에 없었기에 어떻게 흑토끼를 표현할지 고민하다가 토끼 모양의 앙금을 필링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


처음에는 단순히 흑임자 마들렌에 토끼 모양 앙금을 더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필링 재료를 고심하다가 문득 참깨와 괜찮은 조화를 이루는 당근으로 마들렌을 만들면 제철 채소이기도 하고 토끼와 연관성도 있어서 훨씬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근과 흑임자 베이스에 대추, 견과류를 섞고, 흑임자로 만든 토끼 모양 앙금을 크림 필링에 넣어 모양을 낸 마들렌을 계획하게 됐다.


버터 대신 사용한 오일과 높은 수분율의 당근 때문에 반죽이 묽은 편이었지만, 생각보다 배꼽이 풍성하게 나와서 촉촉하고 가벼운 식감의 마들렌을 완성할 수 있었다.



레몬의 옅은 산미를 지닌 크림치즈 프로스팅이 정신없이 날뛰는 다양한 부재료와 향신료를 한데 모아 맛의 중심을 잡았고, 은은한 단맛과 감칠맛의 당근 그리고 고소한 흑임자의 향미가 매력적이었다.


흑토끼 앙금이 생각보다 맛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모양을 빚는 게 너무 힘들어서 다음에는 그냥 원형으로 대체해야 할 것 같다.


다양한 식재료가 한데 뒤섞여 오묘하지만 멋진 맛을 만들어냈듯이 다들 다양한 사건 사고 속에서 자신만의 멋진 행복을 찾아내는 한 해를 보내길 바란다.


편안한 설 연휴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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