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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Dec 12. 2023

겨울의 너에게

안녕, 모모. 벌써 12월이야. 너와의 과거에 매여있는 건 아니지만 이따금 생각이 나네. 추위와 칼바람이 온몸의 근육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따뜻한 실내에 들어서면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마냥 잠을 자고 싶어져. 그런데 서울이 아무리 추워도 그 날의 그 곳만큼은 추울 수가 없네.


기억나니? 세상에,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어. 너는 기억 못 할지도 몰라. 나에게는 모든 게 얼어버린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게되면 늘 생각이 나는, 심장 속 깊이 새겨진 이야기인데. 


우리가 친구 사이를 넘어 한창 연애를 하던, 같은 동네에 살던 시절이었어. 그 도시는 늘 서울보다 조금 더 추웠지. 그 날은 유독 추웠어. 영하 십 도 이하의 기온에 주머니 속 핸드폰 배터리가 눈에 띄는 속도로 줄고 말 그대로 눈보라가 치는 날이었잖아. 눈송이가 크지는 않았는데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그 작은 눈송이들이 비처럼 나를 때렸어. 일과를 끝낸 나는 너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눈보라를 뚫고 어두컴컴한 거리를 걸어 네 집으로 갔어. 비밀번호를 치고 네가 살던 원룸 안으로 들어갔는데 너는 언제부터 그러고 있던건지, 불도 안 켜고 텔레비전만 켜 놓은 채 침대에 모로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졸린 눈을 하고 있었어. 


갓 태어난 아기 강아지처럼 힘 없이 이불 밑에 숨어있던 넌, 그냥 그대로 있고 싶어했고 나는 배가 고팠어. 그런데 그날 따라 배달 음식은 먹기 싫었어. 요리를 잘했던 너는 평소 나에게 저녁을 몇 번이나 해 주었지만 그 날은 집에 재료도 없었고, 네 체력도 없었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사오자고 조르는 나에게 네가 그랬지. 가위바위보 해서 지는 사람이 나갔다오자고. 


그래서 누가 이겼게? 내가 이겼어. 나는 기뻐서 너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는데, 너는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아예 숨어버리더라. 그런데 그 모습이 밉지 않고 마냥 예쁘기만 하더라. 누워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이미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더 깊이 이불 속에 얼굴까지 집어넣어버리는 너를 보면서 웃음이 났어. 그 때의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너를 제일 좋아했고 아꼈고 위했어. 너를 위해 문자 그대로 뭐든 할 수 있었어. 너는 나에게 종교였어. 나는 너의 가치관과, 네가 타인에게 보여주는 애정과, 네가 책보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까지 모든 걸 숭배하고 좇았어. 너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엄마, 아빠 빼고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어쩌면 거의 엄마만큼이나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네가 말했으니까.


결국에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을 간직한 외투를 입은 내가 혼자 집을 나섰고 너는 내가 우유를 사오면 밀크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어쨌든 배가 고팠던 건 나니까, 찬바람을 맞으며 빵집까지 가서 먹고 싶은 것들을 고르고 마트에 들러 우유까지 사서 또다시 얼음도시 같은 거리를 걸어 돌아왔어. 


네 집 비밀번호를 치는데 안에서 후다닥 네가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어. 문을 열자마자 너는 나에게 따스한 포옹과 뽀뽀를 마구 퍼부어줬어. 얼어서 빨개지고 딱딱해진 내 두 손을 감싸고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지. 어쩜 그렇게 사람 기분좋아지게 하는 너스레를 잘 떠는지. 가위바위보를 이기고도 밖에 다녀온 게 전혀 억울하지 않았어. 추위와 피로가 너의 토닥임으로 다 사라져버렸어. 내가 항상 말했지만 너는 말을 참 예쁘게 해. 너와의 경험 때문에 나는 영어로 연애하는 사람들은 다 말을 다정하게 하는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너는 아주 빠르게 내가 따뜻한 침대에서 쉴 수 있도록 해주고 바로 냄비에 우유를 부어 밀크티를 만들기 시작했어. 그 후로는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우리 둘 다 따뜻한 밀크티와 빵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었겠지? 밀크티가 다 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빵을 뜯어먹기 시작했을지도.


미친 듯이 추운 날이면 떠오르는 이 몽글몽글한 기억. 마음을 덥혀주는 추억을 준 네게 고마워. 네가 그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서 나랑 같이 나갔다 왔을 수도 있겠지,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다른 남자들처럼. 근데 그랬다면 그 날 밤이 이렇게 기억에 남지 않았을거야. 너는 우리와의 관계에서 늘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주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내가 원했던 것 이상의 것, 차원이 다른 것을 주고 있더라.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그림을 그리지만 완성된 그림을 보면 나는 항상 내 그림보다 네 것이 더 마음에 들었어.


이제 너는 나와 다른 대륙에 서 있지만 하늘을 보면서 네 생각을 해. 적어도 하늘은 조각나있지 않으니까,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잖아. 색깔은 달라도 거기에서 여기까지 하나로 이어진 하늘. 너와 내가 인종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그렇게 대화가 잘 통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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