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원 Oct 28. 2023

삼십 대의 에버랜드

햇빛의 열기가 피부를 익히는 무덥던 여름이 드디어 끝나고 선선한 공기가 기분좋게 온몸을 감싸는 가을이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에버랜드가 생각이 났다. 마지막으로 에버랜드를 갔던 게 벌써 십 년이 지나 아주 어둡고 희미한 기억이 되었다. 스마트폰 이전 시절임에도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도대체 그 파일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더더욱 흐린 기억. 에버랜드의 상징인 큰 나무 앞에서, 정원 안에 있던 하트 프레임의 의자 위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젊은이에게 차도 있겠다, 내친 김에 교복까지 빌려 소풍가는 기분으로 제대로 다녀와보자. 사진도 많이 남겨서 십 년 후에도 생생하게 기억하자. 당찬 결심과 함께 에버랜드행을 계획했다.


핸드폰에 에버랜드 어플도 설치하고 교복 대여 후기, 에버랜드 추천 코스 등을 짬짬이 검색하며 설레는 마음을 중무장시켰다. 에버랜드에 간다니 엄마는 '네가 애냐'라며 핀잔을 주었다. 엄마 앞에서는 당당하게 에버랜드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외쳤지만 조금은 민망했다. 주변 친구들은 남자친구랑 가는 대신 애를 데리고 가니까. 뭐, 나는 내가 배 아파 낳은 애는 없지만 어쨌든 애랑 가니까 된 거 아닌가 싶었다. 혈기 왕성하고 나이도 어리고 체력이 넘치고 만화보는 걸 좋아하는 게 딱 애나 다름없는, 나의 젊은이랑.


에버랜드 근처에 위치한 교복대여점에 들어서니 우리 말고도 네 커플 정도가 있었다. 모두가 우리보다 한참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하나같이 볼이 통통하고 체격이 있어서 나의 스무 살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느라 하루종일 앉아만 있느라 찐 살이 나의 경우에는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다 빠졌다. 그 애들을 보며 생각했다. 너네도 학교생활 열심히 했구나. 아직 교복 벗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다시 교복이 입고 싶나 봐. 그 마음 알지, 못생긴 우리 학교 교복 말고 예쁜 교복 입고 싶은 거!


깔끔하게 다려져서 가장 상단의 단추가 하나 채워진 채 그림처럼 예쁘게 줄지어 걸려 있는 흰 셔츠들, 디자인 별로 나누어져 걸려 있는 색색의 치마들과 자켓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너무 연예인 의상같지 않은, 무난한 밤색의 교복을 골랐다. 나 어릴 때에도 딱 붙는 스타일의 교복이 유행해서 옷들이 조그마했는데 그 때 입던 것보다 더 작은 사이즈의 옷이 몸에 맞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십 대 때는 해가 바뀌면 더 큰 교복을 샀는데 이제는 쪼그라들어서 더 작은 교복을 입는다니. 젊은이와 함께 밤색 교복을 맞춰입고 둘이서 거울 속을 들여다 보니 누가 봐도 교복 코스프레를 한 어른이었다. 생소한 우리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 아이러니의 맛에 입는 거지.


드넓고 탁 트인 에버랜드에 입장해서 나는 어릴 적 친구들과 그랬던 것처럼 첫 목적지를 향해 뛰었다. 놀이공원 입구에서는 항상 뛰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요즘 에버랜드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판다 식구를 보기 위해 줄을 섰다. 5분이라는 짧은 만남을 위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만난 판다, 아직 어린이인 푸바오는 나무 구조물에 빨랫감처럼 널려 있었고 엄마인 아이바오는 평상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거대한 덩치에 맞게 지내는 공간이 아주 넓었다. 판다들을 보며 집에서 판다들과 비슷한 자세로 편안하게 널부러져 거실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즐기고 있을 우리 집 고양이들이 생각났다. 


그러고 나서는 몇 년 전, 영혼은 없지만 끝내주는 리듬감으로 고객 응대를 해서 화제가 되었던 아마존 익스프레스, 그리고 늘 인기가 많아 두, 세 시간 씩 기다려야 하는 티 익스프레스를 타러 갔다. 어찌나 줄이 길던지 오후 내내 서서 기다리기만 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말이 많은 젊은이도 어느 샌가 말이 줄었다. 우리는 같은 줄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벽에 있는 낙서 중 젊은이가 읽을 수 있는 키릴 문자를 찾거나, 가위바위보를 해서 딱밤때리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마존 익스프레스를 기다릴 때 우리 앞에 어린 커플이 있었는데 짐을 들어주는 문제로 투닥거리고 있었다. 남자애가 더운지 가죽자켓을 벗어 여자애에게 들어달라고 했는데 여자애는 본인 가방을 메고 있는데다 남의 자켓까지 들려니 무거운 모양이었다. 무겁다며 다시 자켓을 돌려주려는 여자애의 팔을 밀어내며 남자애는 '내가 아까 너 가방 많이 들어줬잖아.'라고 자신의 짐을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를 댔다. 그러자 여자애는 내 가방에 네 지갑도 있고 그립톡도 있고 어쩌구...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자켓을 잘 들고 있었다. 나도 사실 물병과 양치도구, 화장품이 든 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왔는데 에버랜드 입장을 위해 신이 나서 뛸 때 젊은이가 가방을 채 갔다. 그리고 에버랜드를 돌아다니는 내내, 내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찾을 때 조차도 내 가방을 들고 있었다. 마치 자기 가방처럼. 왜일까? 나보다 힘이 세서? 힘이 센 걸 어필하고 싶어서? 우크라이나 남자들은 다들 그래서? 가방을 들고 뛰는 내 속도가 너무 느려서?

  

무슨 이유이던간에 나는 젊은이가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무겁지 않냐고 내가 잠깐 들겠다고 해도 한사코 괜찮다고 말하는 게 고마웠다. 기프트샵에서 내게 갖고 싶은 게 없냐고 재차 확인할 때도 그랬다. 기념 마그넷을 하나 손에 쥐고 자기만 뭔가를 사서 나오는 게 미안했던지 나에게도 하나 고르라고 했다. 나는 정말로 갖고 싶은 게 없어서 다 애기들 거네, 라고 말했다. 그렇게 챙겨주는 게 고마웠다. 연애할 때는 나도 심각한 호구가 되는 편인데 나 혼자 퍼줘도 나는 늘 상관없었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나를 챙겨주는 것을 느껴보니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우리는 앵무새의 집에 들어가 다채로운 색상의 새들이 가득한, 높은 천장의 돔에서 앵무새에게 먹이도 주고, 춤추는 앵무새도 보았다. 수영하는 펭귄을 수조 옆쪽, 아래쪽에서 볼 수 있었고 사파리 버스를 타고 호랑이, 사자, 곰도 여러 마리 보았다. 젊은이도 키가 거의 이 미터에 몸무게가 90kg나 나가서 한 덩치 하는데 버스 밖의 곰들은 그보다도 훨씬 몸집이 컸다. 크기가 우리 집 고양이들보다도 작은, 아기처럼 조그마한 원숭이들, 몸뚱이가 아주 두꺼운 밝은 노란색의 뱀, 이국적인 외관의 카피바라와 털이 복슬복슬한 알파카도 보았다. 젊은이도 나도 동물을 무척 좋아해서 찬찬히 구경을 하는 게 즐거웠다.


에버랜드의 부지를 반도 채 돌아다니지 못했는데 하늘이 어두워졌다. 사파리의 입장 줄을 서 있는 사이 금세 해가 졌고 사파리 동물들을 볼 때는 이미 주변이 캄캄해져 있었다. 동물들을 보고 나와서 어디선가 나오는 음악을 따라가니 반짝반짝 빛나는 퍼레이드 마차들과 그 사이사이를 춤추는 무용수들이 있었다.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혹시나 이 무용수들도 우크라이나에서 온 건 아닐까 궁금했지만 얼굴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퍼레이드를 보다가 폐장 전 불꽃놀이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이동하는 길에 정말 많은 음식점이 닫혀있었는데 그동안 찾아헤매던 츄러스 가게는 열려 있었다. 거기도 줄이 있어서 뛰어가서 줄을 섰다. 가게가 마감이라 남아있는 메뉴가 모든 맛의 츄러스를 혼합해서 파는 것 밖에 없었다. 어쨌든 다행히도 나는 먹어보고 싶었던 오레오 츄러스를 맛볼 수 있었다. 우리 뒤에도 줄이 꽤 길었는데 우리가 구매하고 나서 직원이 이제 5통 남았다고 큰 소리로 안내를 했다. 우리 진짜 운이 좋아! 뛰어서 줄 서기를 잘했다고 이야기하며 맛있게 먹었다. 오레오 츄러스가 세 개 들어있었는데 낮에 내가 하도 오레오 츄러스 노래를 불러서 그런지 내가 두 개를 먹도록 젊은이가 양보해줬다. 분명 젊은이가 나보다 어린데... 내가 더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았다. 


불꽃놀이는 영상과 함께 진행되었는데 영상의 내용이 꽤 유치했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부터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였다. 영상의 초반부에는 강조를 주는 부분에서만 불꽃이 나왔지만 후반부는 영상보다 불꽃이 메인이었다. 꽤 길게 불꽃이 이어졌다. 주변 조명을 다 끈 새카만 하늘에 번지는 빨강, 초록, 노랑, 파랑의 불빛들이 얼마 전 관람한 여의도 불꽃축제의 불빛보다 더 환해보였다. 국제적인 규모의 여의도 불꽃축제보다는 불꽃이 훨씬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불꽃을 아주 가까이서, 주변이 어두운 곳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걸 특별한 날이 아니라 매일 한다고? 나는 밤하늘의 넓이와 불꽃의 눈부신 반짝임에, 사람들의 작은 탄성에, 내 등 뒤에서 나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동물의 따뜻함에 압도되었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내 몸은 따뜻했고 하늘은 어두웠지만 불꽃은 밝았고 주변에 사람은 많았지만 조용했다. 이 대조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놀이공원은 동심을 찾기 위해 가는 곳이라고들 한다. 이번 에버랜드 여행에서 나는 완벽하게 어린 아이가 되었다. 가방도 없이 자유롭게 뛰어다녔고 예쁜 옷을 입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젊은이에게 몸을 기대 쉬었다. 오랜만에 가위바위보도 하고. 십여 년 전에 왔을 때는 나이만 성인이었지 그냥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온갖 세금과 관리비, 대출금을 어깨에 진 진짜 어른인데도 나는 어린 아이로 변신할 수가 있었다, 젊은이 덕택에. 그러고보니 범퍼카를 탈 때 내 차를 들이받은 차를 복수하듯이 젊은이가 여러 번 들이받았다. 나는 보호받는 아이, 젊은이는 나를 지켜주는 어른. 롤플레이 혹은 소꿉놀이 같은 이 연애가 새롭고 기분좋다.


밤 열두 시가 넘어 각자 집에 도착했다. 젊은이에게 메세지가 왔다. 너무나 즐거웠고 오늘 하루를 소중한 추억으로 평생 기억할 거라고.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놀이공원은 처음 와봤다고 했다. 높이가 이만큼 높은 롤러코스터 그리고 회전목마, 사파리 버스 모두 다 처음이라고 했다. 메세지를 받고 두 배로 기뻤다. 십 년 뒤에도 어제 일처럼 기억할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었고 나 뿐만 아니라 젊은이까지, 2인분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나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꿈꾸던 동심을 찾았다.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바로 용인에.

작가의 이전글 오래된 일기장 속의 어린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