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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 Jan 04. 2024

일상의 조각들

다시, 페렉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것, 나머지인 것, 모든 나머지 것,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되돌아오는 것, 흔한 것, 일상적인 것, 뻔한 것, 평범한 것, 보통의 것, 보통-이하의 것, 잡음 같은 것, 익숙한 것. 어떻게 그것들을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어떻게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

- 조르주 페렉 <보통 이하의 것들>에서


새해 첫 대면 출근 날. 740번 버스를 타러 집을 막 나서다가 새벽에 확인한 문자 한 통이 생각나 택배함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제 주문했던 책이 무사히 배송되었으며, 택배함에 보관해두었다는 안내 문자였다.


택배함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마음에 두리번거리다 혹시나 하는 맘에 뒷편에 있던 우체통 꽂이를 얼른 확인했다. 우리집 우체통에 심술맞게 꽂혀 있는 알라딘 택배 상자 하나가 보였다. 다행이다, 여기다 두셨구나, 왜 집 문 앞에 던져두지 않으셨지, 하며 상자를 꺼내는데, 꺼내자마자 이런 글귀가 써 있는 게 보였다.


'제발 도로명 주소로 써주세요. 그리고 공동 현관 비밀번호도 틀리게 적으셨어요.'


굵은 매직으로 마구 휘갈겨 쓴 그 글자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 너 때문에 화났다.'


알라딘에 들어가 주문상세페이지를 다시 확인해보니 예전에 살던 집 공동 현관 비번이 적혀 있었다. 여태 별 문제 없이 택배가 잘 도착했기에 잘못 적혀 있었는지 몰랐건만. (아마 그동안엔 택배 아저씨가 운 좋게 다른 분과 함께 공동 현관을 통과하셨던 것 같다.)


여튼, 아침부터 아저씨를 화나게 해서 괜히 미안했다. 상자를 꼭 안고 버스정류장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카페라떼 음료를 사면서 커터칼을 빌렸다. 택배 상자 테이프를 떼려고. 상자를 열자 뽁뽁이에 소중히 쌓여 있는 양장본 하나가 보였다. 어젯밤 주문했던 조르주 페렉의 <보통 이하의 것들>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페렉. 눈물나게 반가웠다.

 



막 도착한 740번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만차에 낑겨 출근하는 것이 죽도록 싫어 버스에 타지 않았다. 다행히 바로 뒤에 740번 버스가 또 오고 있었다. 그 버스는 자리가 꽤 많이 있었고, 나는 기분 좋게 올라타 빈 자리에 몸을 던졌다.


앉자마자 가방에 숨겨왔던 아이스 카페라떼를 꺼내 마셨다. 버스엔 음료를 들고 타면 안되지만, 나는 늘 몰래 마신다. (몰래 마시면 더 맛있다!) 빨대가 꽂혀 있으니 안전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가 흔들리면서 커피가 역류했다. 가방 위로 커피가 흘렀고, 나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분주하게 소지품들을 닦아야 했다. 아침부터 이게 뭔 일이람.


정신을 가다듬고 창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낯설었다. 오랜만의 출근이었다. 지난달 29일부터 쭉 쉬었고, 이번주는 재택근무였으므로.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 페렉의 문장들을 읽었다. 별 내용 아니어도 좋았다. 나는 그가 집요하게 더듬고 기록하는 일상의 순간들, 거리들, 사물들을 읽는 것이 좋다. 별것 아닌 것들이 결코 별것 아니지 않다고 말해주는 그의 시선을 가만히 따라가는 여정이 즐겁다.


책장을 덮고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달라져 있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특별해보였다. 그 무엇도, 일상적이지 않았다. 내일 740번을 타도, 다음주 월요일에 또 740번을 타도, 나는 이 시선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겐 페렉이 있으니까.




다행히 내일은 또 재택을 할 수 있고, 나는 카페에 갈 것이다. 다음주엔 740번 버스가 아니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것이다. 내일은, 그리고 다음주에는, 페렉의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들을 읽을 것이다. 무언가를 또 쓸 것이다. 볼 것이고, 들을 것이고, 만날 것이고, 대화할 것이다. 기뻐하고, 후회할 것이다. 슬퍼하고, 또 괜찮아질 것이다. 때론 화도 날 것이다.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종종 뿌듯할 것이며, 가끔씩 행복도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주.


그렇게 매일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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