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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 Feb 15. 2024

눈 내리는 오후

2024년 2월 15일 (목)


카페 창가에 앉아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었는데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고, 하얀 가루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한겨울 눈처럼 펑펑 쏟아졌다. 불과 지난주에도, 이렇게 카페 창밖으로 눈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 앉아 있던 곳은 오늘처럼 동네 카페가 아니라 강릉 주문진에 있는 한 카페였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김고은이 공유에게 안개꽃인가 무슨 꽃을 건네주던 바닷가를 향해 난 예쁜 돌길) 바로 앞에 있던 카페. 급작스레 아무 계획 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났던 여행이었는데, 내내 눈이 왔다. 파도는 또 어찌나 거칠게 몰아치던지. 바닷가를 걷고 싶다는 나의 계획은 보기 좋게 무산되었다. 그래도 부지런히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먹고, 카페에 앉아 라바투트의 신작 소설을 읽고, 자주 멍때리고, 숙소에선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재방송과 이효리의 레드카펫 생방송을 보다 잠들었다.


강릉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사진: 연지)


돌아온 뒤 나는 평소처럼 밴드 합주에 나갔고, 은혜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갔으며, 운동을 갔다. 라바투트의 매니악 서평 글도 마무리해 제출했다. 연휴 직전 날엔 사직서에 사인을 하러 오랜만에 회사에 들렀다. 나의 자리에 있던 델 32인치 모니터도 떼왔다. 회사 짐들과 함께 그걸 온몸으로 안고 택시를 타자 기사 아저씨가 굉장히 놀라워하셨다. 누구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아가씨 혼자 무겁게! 하면서. 나는 그저 힘없이 웃어보일 뿐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고개를 다시 들어보니 어느새 눈은 약한 비로 변해 있다. 어제는 오랜만에 정말 따뜻해져 가을 옷을 꺼내 입었건만,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눈 내리고 난 뒤 낼부터는 영하로 또 떨어진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나날. 이젠 계획대로 되는 것들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영원한 건 없다. 그래도 그 덕분에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계속 놀라워할 수 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치 판단을 하기보다 일단은 그저 온몸으로 느낄 것이다. 내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고 싶어하는지 가만히 지켜볼 것이다. 2월 말까지는, 이렇게 내게 조금 시간을 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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