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맞게 익어가는 중 : 장과 함께
'그런데 우리끼리 장을 담글 수 있을까? 할머니나 엄마, 요리 선생님 같은 여성어른이 없이도?'
장을 담그기로는 했는데 막상 닥치니 막막했다. 일단 유튜브에 '장 담그기'를 검색해서 영상 몇 개를 쓱 훑어봤다. 보면 볼수록 감이 잡히기보다는 복잡했다. 만드는 방법이 비슷해 보여도 조금씩 다른 점들이 있어서 어떤 영상을 따라야 할지 선택이 어려웠다. 메주를 물에 씻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항아리를 깨끗이 소독하기도 하고 휘휘 물을 받아버리는 정도로만 끝내기도 하고. 메주와 소금물, 고추, 숯 이외에 넣는 재료들도 다 달랐다.
머리가 복잡해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했다.
'왜 굳이 장을 담그려고 하지?'
우리는 대단히 맛있는 장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장을 만드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되도록 단순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좋지 않을까?'
각자만의 비법이라고 붙은 살들을 싹 발라내고 중요한 뼈대만 남기기로 했다.
그러다가 그림책 <우리학교 장독대>를 만났다. 책은 이렇게 말했다.
'간장 떡볶이가 정말 맛있지요?
그 재료인 간장을 만들어볼까요?
간장을 만드는 일은 라면을 만드는 일처럼 쉬워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은 간단하고 분명했다. 딱 우리에게 필요한 내용이었다. 이후에 이 얇은 그림책은 장 담그기 과정마다 먼저 열어보고 답을 찾는 '장 바이블'이 되었다. (100개의 집이 있으면 100가지의 장을 만드는 방법이 당연하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레시피의 뼈대를 세우고 거기에 맞는 재료와 도구를 착착 준비해 갔다. 장 담그는 날에 맞춰서 메주를 주문하고, 각자 집에서 준비할 재료와 구매할 재료를 구분해서 마련했다. 반장님이 원하는 사이즈의 항아리를 준비해 주셨고, 며칠 째 물을 받아놓았는데 세지 않는다는 썸머의 연락으로 재료 준비는 얼추 끝이 났다.
장 담그기 전 날 밤, 사전 준비를 위해서 썸머네 집에 모였다. 날짜에 맞춰서 배송이 온 메주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호기심, 신기함, 설렘, 당혹스러움. 상자를 열자 훅 풍겨온 메주 냄새와 함께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 어려서 외할머니댁에서 메주를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어른이 되어서 생생하게 만난 메주는 발효 냄새가 고소해 꼭 큰 캄파뉴 같았다. 모습은 재사용 기름을 이용해 만든 못생긴 빨래용 비누 같기도 했다. 호기심에 반으로 갈라 한 입 떼어먹은 메주에서는 흡사 치즈의 풍미가 느껴졌다. 오 맛있는데?
다음에 장을 담글 때는 화이트 한 병을 챙겨도 좋겠다는 말로 여유를 부리며 준비를 해갔다. 메주는 흐르는 물에 대충 씻어서 건조해 두었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서 분량의 소금을 붓고 남김없이 녹였다. 마지막에 달걀을 하나 동동 띄워서 500원 크기 정도만 뜨는지 확인하며 염도 체크까지 완료했다. 그런데 순조로운 줄 알았던 준비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항아리 바닥에서 자꾸 돌가루가 나왔다. 돌가루가 된장 안에 들어가서 씹히면 어떻게 하지? 내일 새벽에 배송이 오는 것으로 사야 하나? 시장에 들러서 사 와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밤 9시가 넘은 시간 항아리를 주신 반장님을 부르기로 했다. 똑똑 반장님 저기..
반장님은 욕조에 항아리를 가져가 물을 조금 받고는 번쩍 들어서 휘휘 저어 다시 버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돌가루가 더는 나오지 않는 깨끗한 바닥을 보여주셨다. 휴 다행이다. 반장님은 우리가 준비한 것을 한 번 훑어보시면서 고마운 참견을 해주고 가셨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는 말씀을 덧붙이고서는.
역시 여성 어른이 없이는 힘든 일이었어. 그들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응원이 없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