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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아모르보르의 몰락

이야기, 이론 그리고 그림

(이 이야기와 그림은 2024년 캐나다 문예지 Espaces spéculatifs에 프랑스어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espaces-speculatifs.uqam.ca/activit%C3%A9


바벨, 아모르보르의 몰락 - 이야기, 이론 그리고 그림


애도문 


바벨 위에서 짐승들이 쓴 첫 번역어는 아마 « 신 »이었을 것입니다.  짐승들은 그 단어를 향한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날카롭게 만든 벽돌로 짐승들은 하늘을 베었습니다.  찢긴 하늘의 살을 잡고 짐승들은 무한을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 신의 혀를 자르기 위해 ». 


남겨진 짐승들에게서 새 짐승들이 생겨났습니다. 고원의 암컷들은 벽돌을 깨고 파내며 구덩이들을 파내려 갔습니다.  그 암흑들 안에서 음산한 울부짓음은 자장가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구덩이들은 하나의 크고 깊은 구렁이 되어 도시의 땅에 다다렀습니다. 


빈 공간 안에서 처음으로 땅을 밟은 새끼들은 그 두꺼운 벽에 좁은 터널들을 뚫어 바벨을 탈출합니다. 하지만 암컷들은 계속 아래로 구덩이를 파내려 가  결국 영원히 추락하는 심연을 만들었습니다. 심연으로부터의 울부짖는 목소리는 저주의 탑 밖에서 인간이 된 새끼들을 끌어당깁니다. 새끼들을 살기 위해 바벨의 벽에 각자의 언어를 그립니다. 그 언어의 벽이 완성되자 바벨탑은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애도 중인 유령-건축가를 깨운 것은 관능-암캐입니다. 그 생명의 힘에 이끌려 유령-건축가는 갱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갑니다.  유령-건축가 앞에 두 개의 선택이 있습니다.  카타바시스 katabasis 그리고 아나바시스 anabasis.  유령-건축가가 위로 행하자 그의 몸에서 모든 체액들이 빠져나갑니다. 심연은 그의 모든 체액을 빨아들입니다.


가벼워진 유령-건축가는 아모르보르들 amorvores 의 고원에 다다릅니다.  고원 위에서 유령건축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바벨의 회전 때문에 바벨탑 밖으로 날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령건축가는 그 자전의 반대 방향으로 걷습니다. 사각형 구덩이 때문에 유령건축가는 고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유령건축가는 조심스레 찢어진 하늘의 살을 잡습니다.  한 손은 무한을 잡고 한 발은 심연을 밟으며 유령건축가는 우아하게 도약합니다. 유령건축가는 삶의 춤을 춥니다. 심연과 무한사이에서 언어의 자전과 역행하며 추는 비상의 춤,  그 춤을 추며 유령건축가는 아모르보르의 몰락을 찬양합니다. 



바벨 - 평면, 입면, 단면 (원 키메타아스 그림)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 신화에서 언어와 건축은 은유적으로 만납니다. 신의 저주로 인한 언어의 산종으로 바벨탑의 건설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미완의 바벨탑은 문명의 불완전성의 상징입니다. 이 저주받은 탑은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자기의 건축적 지식을 바탕으로 바벨탑을 상상한 예술가들은 이 구조물을 내부공간을 지닌 거대한 건물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예로 피르터 브뤼헐 더 아우더가 1563 년에 그림에서 그린 바벨탑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수많은 아치들로 구성된 건물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건축의 원형으로 바벨탑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의 바벨탑은 건물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건축적 이상에 « 거주 »라는 외재적 목적을 위한 빈 공간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 « 중앙에는 견고한 조적식 탑 (속이 비어 있지 않고 꽉 찬, 육중한 탑) 이 우뚝 서 있었노라고, 이 거대한 작품을 보았던 헤로도토스는 이야기한다. » (Hollier, 1971. p.47). 


우리는 바벨탑이 속이 꽉 차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령건축가가 앞의 회전하는 바벨탑은 속이 비어 있는 건물입니다. 이 타워는 분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터널들이 있는 잘린 원뿔의 건물입니다. 그 거대한 벽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아마도 산종된 언어들의 문자들 일 지도 모릅니다.


원래 바벨탑은 속이 꽉 찬 덩어리였습니다. 신의 저주 이전의 인간인 아모르보르들 amorvores 은 바벨탑 외부에 붙은 경사를 따라 무한에 거의 다다렀습니다. 그냥 그 탑을 완성했었으면 좋았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모르보르들은 신처럼 되면 못 느낄 동물적 오르가슴을 마지막으로 느끼고 싶었습니다. 후에 관능성 암캐 la chienne sensualité (Nietzsche, 1903, 순결에 관하여 p. 94-95)로 다시 나타나는 « 생명의 쾌감 »으로 인해 아모르보르들에게 « 사랑한다는 것과 몰락한다는 것 »은 일치 (Nietzsche, 1903, 결백한 인식에 대하여, p. 163-165) 하게 되었습니다. 


심연은 사물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끌리는 동시에 그것을 피하고 싶은 사물 (la Chose / das Ding)입니다. 반면 벽은 문명화로 인해 만들어진 산물 (l’objet / die sache) 입니다. 이 문명화는 사물을 은폐하기 위한 산물들의 질서를 세움입니다. 바벨탑의 언어의 벽은 인간이 된 새끼들이 심연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않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탈출하기 위해 만든 동굴이 여전히 언어의 벽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심연으로 다시 끌려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물로서의 단어들은 사물 주위를 돌며 인간이 심연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습니다. 이 단어들의 공전은  언어적 기표의 연쇄입니다. 이것은 바벨탑의 자전입니다.


유령건축가는 산물 너머 사물에게로 스스로 다가갑니다. 유령건축가는 부성적 언어의 벽을 통과해 사물과 맞대면합니다. 하지만 유령건축가는 심연으로의 추락 대신 무한을 향해 오릅니다. 그것은 초월적 승천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살로 행하는 실존적 수행입니다. 바벨탑의 위에서의 유령-건축가의 춤은 무한과 심연 사이에서의 예술입니다. 이제 « 심연은 말하고 » 그렇게 하여 유령-건축가는 « 모든 사물을 넘어 춤춥니다. /  l’homme danse sur toutes les choses. » (Nietzsche, 1903, 회복기 환자에 대하여, p. 259-260).


바벨 - 단면 투상도 (원 키메타아스 그림)

Ansaldi, J. (1998). La notion de Das Ding . Cairn.info. Dans Lire Lacan : L’éthique de la psychanalyse. Le Séminaire VII (p. 23‑32). Champ social. https://www.cairn.info/lire-lacan-l-ethique-de-la-psychanalyse-le-seminai--9782913376007-p-23.htm 

Lacan, J. (1986). Le Séminaire. Livre 7, L’éthique de la psychanalyse. Seuil. 

Nietzsche, F. (2020). Ainsi parlait Zarathoustra (l’édition de la Société du Mercure de France : Édition numérique Arvensa). 


바벨 - 외부 투시도 (원 키메타아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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