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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빛꿈 Aug 06. 2024

독후감-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연달아 읽고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니 만들어지는 생각이 있어 이번 독후감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되었다.


1.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읽어 본 것은 <해변의 카프카>,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마지막이 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그래도 앞의 세 작품을 읽어 보니 어느 정도의 비교점이 생겼다.


우선 모든 작품에서 '하루키의 작품이다'라고 할 만한 향기가 공통적으로 느껴졌다. 한 남자가 시간을 역행해 묘사하는 이야기, 자연스러운 비현실과의 연결, 어떠한 대상에 은유된 주제의식, 갑작스런 누군가의 실종...


거의 모든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변주되어 적용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자기 복제라고, 누군가는 작가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저 읽을 때마다 '재미가 있다면' 상관없다는 입장이고, 이때까지는 그의 이런 공통된 방식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다른 작품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드디어'라고 해도 좋을지, 성교에 관한 묘사가 없었다. 내가 이때까지 하루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이상하게도 성교 묘사가 잦다'라는 것이다.


한때 어떤 짤을 본 적이 있다. 한국 영화는 갑자기 입맞추지 않을까 긴장하며 보고, 외국(주로 서양) 영화는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섞지 않을까 긴장하며 본다는 내용이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3권째 보았을 시점에는 마치 외국 영화를 볼 때처럼 '갑자기 성교하지는 않을까...'라는 긴장 아닌 긴장을 하고 있었고, 아니나다를까 나왔다.


그런데 이번 작에서는 관련한 이야기가 아주 짧게는 나왔지만,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 하루키에게 있어 성교란 자신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데 아주 중요하고, 적확한 수단이지 않았을까 싶다. 육체는 육체일 뿐이고, 정신은 정신일 뿐이다. 각자에 대한 소실은 서로 보완할 수 없다. 이런 메시지를 나는 계속 느꼈고, 그에 알맞은 묘사가 성교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덮었을 때,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작품 속 '내'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요트 파카 소년'을 마주치다, 어느 날 사라졌을 때의 감정과 비슷했다. 그와 동시에 '없어도 잘 하잖아'라는 생각도 들었다.


2. 내가 느낀 것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인터넷이든, 현실이든)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라는 사람이 꽤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은 대체로 '답답하게 열린 결말'같다. 열리긴 열렸으나, 쉽게 납득하거나 속이 시원해질 열림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내가 본 작품들에 한해, 하루키는 작품 속 인물이나 사건, 대상이 나타내는 의미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비교하고, 엮어서 쫓아가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쉬운 내용을 쓴다. 그래서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집중해 읽지 않으면 '결국 무슨 말을 했던 거야?'에 빠질 수 있다.


예전에 봤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애니메이션이 문득 떠올랐다. 이것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도 '그래서 무슨 말인데'라는 반응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명확한 메시지를 느낀 건 아니었다.(애초에 그런 걸 바라고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도 비슷하나, 이건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나의 속도로 곱씹으며 읽을 수 있기에 다행히도 온전히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에 맞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느낀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들이다.

두 번째,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으며, 그것은 결국 나의 그림자에 맡기고 살아가야 한다.


-첫 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나, 나의 그림자, 소녀, 고야스 씨, 고야스 씨의 가족들, 요트 파카 소년, 커피숍 주인 등...) 서로가 유사한 속성을 조금씩 겹쳐 가지고 있다.


'나'와 나의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고, 고야스 씨는 '나'와 비슷하게 잃어버려 되찾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소녀는 '나'보다 앞서 그림자로 살았고, 요트 파카 소년은 '나'의 뒤에 놓인 그림자가 되었고......


'나'는 끊임없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리고 방황한다. 본체가 그것을 안고 살 것인가, 그림자에 그것을 맡기고 떼어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나'는 그림자를 떼어도 보고, 서로 다른 길을 가려고도 해 보고, 다시 붙어도 보고, 다른 인물을 그림자삼아 사는 길을 택해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 잃어버린 것을 본체로서 안고 살 것인가, 그림자에게 맡겼다고 생각하며 현실을 살 것인가, 실제로 생활하며 비교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작중 인물들이 '나'의 그림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로 이를 끌고 와 보면, 어떤 생각을 안든, 버리든, 그 생각들은 세상에 사는 모두가 일부분씩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렇기에 본인이나 본인의 그림자가 감당하기 힘들다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나누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나'와 고야스 씨가 만나 서로의 아픔을 나누었듯이 말이다.


-두 번째

'나'는 10대에 한 살 어린 소녀를 만나 불같은 사랑을 한다. 더 이상 없을 만큼, 소녀를 잃고 나서는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게 될 만큼. 하지만 '나'는 그 소녀를 잃게 되고, 결국 그 소녀와 만들어낸 '도시'에 가서 잠시 살게 된다. '나'는 그 도시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그림자에게 현실을 맡기고 '도시'에서 평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현실로 튕겨나온다. 자신의 의지와 다른 마음의 작용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강한 마음이,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현실로 끌고와버린다.


그림자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나'는 잃어버렸던 소녀를 맡겼다.


정확히는 맡길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나'는 '도시'에서 살기로 하고 현실을 그림자에게 맡겼다. 하지만 '나'는 현실로 와 버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그림자'가 '도시'에서 잃어버린 소녀와 생활하게 되어 버렸다.(본체와 그림자의 구분이 무의미할지라도, 적어도 현실의 '나'가 인식하기에는 현실에 있는 쪽이 본체였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한 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은 그림자의 몫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고야스 씨의 부인은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생각을 그림자에게 맡기지 못하고, 본체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물에 투신하고 만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은 누구든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영원히 묶여있는 것은 올바를까. 하루키는 이 작품으로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결말에 이르러서, '나'의 그림자(본체일 수도 있다.)는 요트 파카 소년에게 자신의 역할을 맡기고 현실에 나가는 것을 택한다. 본체와 그림자 모두 현실로 나오는 것이다.


작품 중반까지 '나'의 본체는 현실을 살고, '도시'의 일은 그림자가 맡으며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업을 마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서관 지하의 난로, 요트 파카 소년이 그린 지도처럼 '도시'와 관련된 것들을 볼 때마다 흔들린다.


누구든 그림자와 같이 사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 잃어버린 것을 넘기고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온전한 '나'라는 것은 나와 내 그림자의 총체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을 그림자에게 주고 떼어내는 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와 나는 본래 하나이기에, 언제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은 작은 트리거로 부활하고 만다.


그래서 결말의 '나'는 요트 파카 소년을 '도시'에 남겨두고 탈출한다. 본체와 그림자 모두 현실로 가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은 '본체와 그림자의 총체에 대한 그림자'에 맡기는 것이다.


첫 번째 내용과 엮어 생각해본다면, 나는 '온전한 나'로 살아야 한다. 본체와 그림자 모두 잘 붙어 있는, 신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온전한 나. 그 단계가 첫 번째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의 그림자이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와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모두' 또한 각자 그림자를 가진 온전한 존재여야 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주인공은 여러 사건을 겪는다. 초반에 느낀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감은 여러 인물을 만나며 희석되고, 명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아내는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물론 불같은 첫 사랑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나와 나 사이의 벽, 나와 타인 사이의 벽, 그것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불확실한 벽'이 된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도시'에 파고들어 아픈 눈을 가지고 살아가기보다는, '벽'을 허물고 서로를 그림자삼아 치유하고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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