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을 품은 건축, 기억이 되는 공간

풍화와 마모가 만드는 공간의 시간성

by 이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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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언제나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라짐을 전제로 존재해 왔습니다. 재료는 마모되고, 구조는 노후하며, 도시는 끊임없이 다시 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공간을 오래 기억합니다. 어떤 건물은 무너져도 마음속에 남고, 어떤 장소는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이 기억의 지속성은 물리적 존속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라짐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 공간은 더 깊게 각인됩니다.

기억으로 남는 공간은 오래 버틴 결과라기보다, 사라짐 속에서 형성된 시간의 층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건축의 본질은 형태를 고정하는 데보다 변화와 소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력에 순응하는 구조, 두께 있는 경계, 안과 밖이 조율되는 공간은 모두 시간과 마모, 환경 변화에 노출된 채 존재합니다. 벽은 금이 가고, 바닥은 닳으며, 처마는 햇빛과 그림자의 깊이를 바꿉니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을 훼손하기보다, 공간을 살아 있는 기억의 장으로 바꾸는 조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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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건축은 이러한 시간성을 불안정한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시간을 축적되는 경험이 아니라,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할 변수로 다루는 태도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유리와 금속으로 구성된 커튼월 외피는 구조와 분리되어, 풍화(weathering)와 마모를 설계의 일부로 수용하기보다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는 부품적 시스템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적 구성은 건축의 표면을 시간이 작동하며 변형되는 장이 아니라, 교체 가능한 장치로 재구성합니다.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는 건축은 건설 이후에 배우는 것이며, 건물이 어떻게 변형되고 수선되는가가 그 건물의 진짜 능력을 드러낸다고 말하면서, 건축 이후의 변화가 예외나 실패로 취급되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Brand, 1994). 데이비드 레더바로(David Leatherbarrow)와 모센 모스타파비(Mohsen Mostafavi)는 『온 웨더링(On Weathering)』에서 풍화(weathering)가 결함이 아니라 건축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일부임을 강조합니다(Leatherbarrow & Mostafavi, 1993). 그러나 커튼월과 같은 교체 가능한 외피 시스템은 이러한 시간의 흔적을 억제하고, 시간성을 관리와 교체의 대상으로 환원합니다. 이때 시간은 축적되는 경험이 아니라, ‘리셋(reset)’되어 제거되어야 할 변형으로 재정의됩니다.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의 유산 가치 이론 역시 변색과 마모, 균열과 같은 시간의 흔적이 공간의 역사성과 감각을 형성한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흔적이 제거된 표면은 기억을 생산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그는 이러한 시간의 흔적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시간 가치(age value)라고 명명했습니다(Riegl, 1903). 따라서 시간이 축적되지 않는 표면은 시간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그 결과 건축은 시간이 새겨진 흔적으로서의 기억을 상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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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건축의 표면은 늘 새것처럼 유지되는 객체가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시간은 공간 속에 남지 못하고 관리 기록 속으로만 이동합니다. 변화가 축적되지 않는 공간은 시간이 작동한 결과를 감각적으로 인지하기 어렵고, 기억 역시 정착하기 힘들어집니다.

반대로 풍화(weathering)와 마모가 표면에 남아 있는 건축은 시간의 흔적을 경험의 일부로 제공합니다. 표면에 새겨진 변색과 균열, 사용의 자국은 과거의 행위와 환경의 조건을 현재로 불러옵니다. 이때 기억은 상징이나 해석이 아니라, 물질에 스며든 시간의 흔적으로 발생합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젬퍼(Gottfried Semper)의 피복 이론(Bekleidungstheorie)에서 외피는 구조를 가리는 막이 아니라, 시간이 새겨지는 표면입니다. 직물과 장식에서 출발한 피복은 손길과 마모, 기후의 흔적을 받아들이는 장치였으며, 이를 통해 건축은 사회와 환경의 기억을 축적해 왔습니다. 외피가 변화에 열려 있을 때, 공간은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 표면으로 기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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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간성은 여러 건축가들의 작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의 베로나 카스텔베키오 박물관(Castelvecchio)에서는 오래된 석재와 새로운 콘크리트, 금속 디테일이 겹쳐지며 경계가 하나의 표면이 아니라 시간이 중첩된 층위로 구성됩니다. 과거의 벽체는 숨겨지지 않고 노출되며, 새로운 구조는 그 위에 삽입되어 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합니다.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발스 온천(Therme Vals)에서도 돌벽은 중력과 습기, 온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물질적 층위로 작동하며, 표면의 미세한 변색과 촉각적 거칠음은 공간이 사용되고 있음을 기록합니다.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와 엘레멘탈(Elemental)의 주거 프로젝트들은 사라짐과 변화가 배제되어야 할 위험이 아니라, 건축이 전제로 삼아야 할 시간성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의 ‘점진적 주거(incremental housing)’는 완결된 형태를 제공하지 않고, 구조와 외피의 일부만을 제시한 채 나머지를 거주자의 시간 속 증축과 변형에 맡깁니다.

이때 건축은 완성된 객체라기보다, 미래의 변화가 스며들 수 있는 틀로 존재합니다. 아라베나의 주택에서 외피와 경계는 교체 가능한 표면이 아니라, 거주자의 삶이 새겨지는 기록 장치로 작동합니다. 증축된 방, 덧붙여진 창, 색이 바뀐 벽은 설계의 실패가 아니라 시간이 건축에 개입한 흔적입니다. 이러한 흔적은 건축이 사회적·경제적 조건 속에서 살아 움직였음을 보여 주며, 공간은 사용자의 삶과 함께 늙어 갑니다. 이로써 경계는 상품화된 외피가 아니라, 삶의 시간이 축적되는 층위로 기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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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건축들은 모두 외피를 덮는 막이 아니라 시간과 세계가 만나는 감각적 표면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반대로 교체 가능한 패널과 완성 이미지를 유지하는 외피 시스템은 이 시간성을 제거하여, 공간을 기억의 장소가 아니라 항상 갱신되는 현재로만 존재하게 만듭니다.

기억으로 남는 공간은 완벽하게 보존된 공간이 아니라, 변화와 소멸의 가능성을 품은 공간입니다. 균열과 변색, 마모는 시간이 공간에 개입한 흔적이며, 이러한 흔적이 쌓일 때 공간은 하나의 이야기로 인식됩니다. 재개발과 갱신이 반복되는 도시에서 이러한 기억의 공간은 도시가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존재하도록 하는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건축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사라짐을 전제로 할 때 공간은 현재의 사용을 넘어 미래의 기억을 향해 열리게 됩니다. 기억으로 남는 공간은 오래 버틴 공간이 아니라 오래 변화해 온 공간이며, 건축은 그 변화가 충분히 깊게 새겨지도록 자리를 내어주며 기억의 지형으로 남게 됩니다.


참고문헌

Brand, S. (1994) How Buildings Learn: What Happens After They’re Built. New York: Viking.
Leatherbarrow, D. and Mostafavi, M. (1993) On Weathering: The Life of Buildings in Time. Cambridge, MA: MIT Press.
Riegl, A. (1903) The Modern Cult of Monuments: Its Character and Its Origin. Vienna: Loescher.
Semper, G. (1860) Der Stil in den technischen und tektonischen Künsten. Munich: Bruckmann.
Zumthor, P. (2006) Atmospheres: Architectural Environments. Basel: Birkhäuser.
Scarpa, C. (2007) Carlo Scarpa: Architecture in Details. Cambridge, MA: MIT Press.
Aalto, A. (1978) Alvar Aalto: Sketches. Cambridge, MA: MI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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