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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난 Dec 25. 2023

철없는 아이

'비밀의 언덕'을 보고

해당 글은 '비밀의 언덕'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날이 선선해질 무렵 절친한 친구에게서 추천받았던 '비밀의 언덕'을 드디어 보았다. 독립영화엔 익숙지 않고 그나마 몇 번 보았던 독립영화들은 모두 취향이 아니었기에 큰 기대 없이 영상을 재생했다. '비밀의 언덕'은 초등학생 '명은이'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명은이의 부모님은 시장에서 젓갈가게를 운영 중이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나가 장을 열고 밤늦게 돌아오곤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가게를 운영 중이나 대부분의 일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늘 해진 옷에 모자를 쓴 어머니, 언제나 느지막이 일어나 가게에서도 빈둥거리는 아버지를 명은은 부끄러워한다. 때문에 학교 가정조사 시간에 명은은 부모님의 직업을 속인다.


학기 초, 명은이네 학급도 다른 여느 학급과 다를 바 없이 반장을 뽑게 된다. 명은은 비밀 우체통을 만들어 그곳에 종이를 넣어주면 이후 선생님과 의논하여 해당 내용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공약으로 반장이 된다. 이후는 꾸민 듯 평화로운 나날이다. 비밀 우체통에는 늘 종이가 그득하고 명은은 방과 후 선생님과의 논의를 통해 실현 가능한 대부분의 것들을 이루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선생님은 명은이에게 글짓기 대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부던한 노력 끝에 우수상을 입상한다.


그러나 그린 듯했던 그녀의 일상은 보이는 것과 달랐다. 비밀 우체통에 가득한 종이는 모두 명은 자신이 써낸 종이였고 가족들과의 외식 중 우연히 마주친 학우 어머니에게 자신의 가족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며 도망친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오던 일상은 어느 날 전학 온 자매를 마주하며 서서히 변화한다. 자매는 이란성쌍둥이로 그중 하나인 혜진은 명은의 반에, 자매 하얀은 다른 학급에 속한다.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 발표하는 수업 도중 혜진은 손을 들어 놀라운 사실을 말한다.


저는 아빠는 없고요.
엄마는 아가씨 골목에서 일해요.
-비밀의 언덕-


단숨에 혜진과 하얀은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그러던 중 두 번째 글쓰기 대회가 다가온다. 명은은 이번에도 출품하게 되고 지난번과 같이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어 기뻐한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얼굴은 굳어간다. 해당 글쓰기 대회의 최우수상을 수상한 게 다름 아닌 혜진, 하얀 자매였기 때문이다.


혜진은 당당하고 똑똑한 아이로, 학급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수시로 비밀 우체통에 쪽지를 넣는다. 그러나 명은은 이를 몰래 빼내어 자신의 것만이 실행되도록 하고 혜진을 못마땅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명은 또한 따돌림이 되고 혜진, 하얀 자매와 어우러진다.


곧이어 담임교사는 명은과 혜진에게 시 대회에 출전할 것을 권유하고, 명은은 자매에게 글쓰기의 비법을 묻는다. 자매의 진솔함이 담기면 된다는 조언에 명은은 이를 실천하여 대상을 거머쥐게 된다.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한, 가족에 대한 진심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해당 내용이 신문에 게재될 것이라는 사실에 명은은 수상을 취소하게 된다. 명은의 수상 취소로 최우수상이었던 자매가 대상을 수상하게 되고, 그들의 글이 교내에 울려 퍼진다. 그들이 사실은 자매가 아니며, 아버지는 술집 손님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숨기라 종용하지만 혜진은 저를 거두어준 하얀 모녀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최고의 방법이 이를 숨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드러냈다는 내용이었다.


비밀의 언덕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명은은 인정 욕구와 호승심이 강한 아이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력파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모범생'의 자질을 갖춘 그 아이에게 불우이웃을 돕지 않고, 그들은 노력이 부족했기에 저러고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환경을 보호하지 않고 측은지심을 지니지 않는 부모님은 부끄러움의 대상이었다. 번듯한 회사가 아닌 시장에서 일하는 것도, 늘 명란젓이 담긴 반찬통도 모두 감추어야 할 대상이었다. 때문에 아이는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은 후 자신의 아버지인 양 위장하고, 친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인 체한다. 가출을 하여 어머니와 절연한 어머니의 식구, 외할아버지와 삼촌 댁에서 머물며 그들과 부모님을 비교하기도 한다. 친구와 불우이웃에게 베풀 줄 알고, 손녀를 걱정하며 챙겨주고 환경을 보호하는 외할아버지, 막노동을 하면서도 명은을 보러 올 때는 부러 양복을 챙겨 입는 삼촌을 그녀는 퍽 좋아한다.


그러나 명은의 외할아버지는 아내를 폭행하고 가족의 금전적인 면을 가족에게 전임한 채 관망했던 무책임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자신의 아들, 그러니까 명은의 삼촌을 위해 유일한 자산이었던 아파트를 내놓으라 명은의 어머니를 압박하기도 한다. 삼촌은 누이의 등에 기대 자라왔다. 명은의 어머니가 처음부터 남편에게 소리 지르고, 불우이웃을 보며 자신을 안타까워하라 하며, 소탈한 모습으로 지낸 것은 아니니라. 그녀도 바랐으리라. 다정하게 일상을 이야기하는 가족을, 어려운 사람을 돕고 예쁘게 꾸미며 딸이 원하는 것을 사주고, 종종 자식의 학급에 찾아가 간식을 돌리고 싶었겠지. 친구라고 찾아오는 이는 온통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뿐이고, 그나마 남은 가족들은 저에게서 유일한 자산을 앗아가고, 아침부터 밤까지 쉴 틈 없이 일했는데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 현실이 절망스럽고 통탄했으리라.


새벽에 시장 문을 열며 들어야 했던 모진 소리들, 자신이 더러운 무엇이라도 된 냥 자연스레 자신의 옷에 음식물을 닦아대는 동네 사람. 명은의 어머니는 그것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가족을 부양했다.


명은의 아버지는 가족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그 무언가라도 되어서,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저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잘난 사람이 아니라서, 무언가를 해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틈, 찾아온 손님에 온 마음을 담아 영업하지만 손님은 아내가 아니면 사지 않겠다며 떠나려 하고 마침 도착한 아내를 보고서야 가게로 발을 들인다. 스스로가 없게 느껴졌겠지. 어차피 있으나마나 한 존재. 없으면 뭐 어떤가 싶기도 했을 것 같다. 그는 자괴감을 가리고자 의자에 드러누웠다. 얼굴을 감추고 웅크린 자세는 꼭 세상에서 저를 숨기고자 하는 몸부림 같기도 하다.


그런데 부모님이 노력했다고, 명은이를 그저 '나쁜 아이', 혹은 '철없는 아이'로 정의해 버릴 수 있을까.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저가 생각하는 모양으로 만들며 얼마나 많은 부담감과 두려움을 느꼈을까. 누구보다 속을 털어놓고 싶었던 것은 명은이가 아니었을까.


명은이는 부모님이 삼촌처럼, 외할아버지처럼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길 바랐다. 어머니가 밤마다 욕했던 외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은 명은이에게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명은이가 처음 수상하고 신나는 마음으로 달려가 바란 것은, 단지 "잘했다"는 한 마디였다. 아이라면 누구나 부모에게 바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바란 아이를, 거짓말을 일삼으며 처음으로 가족의 이야기를 털어놓곤 가족들이 상처받을까 봐 차마 신문에 게재할 수 없다고, 바라 마지않던 것을 포기한 아이를, 그저 철없다는 한 마디로 속단할 수 있을까.


명은이의 말대로 가족이라는 건, 물음표여서 감히 어떤 평가도 내릴 수가 없다. 모두가 잘못하고, 누구도 잘못하지 않은 관계.


명은이의 부모님이 명은이에게 그러했듯, 명은이도 그저 그들이 너무 소중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지 못했을 뿐은 아닐까.


'비밀의 언덕'은 글쓰기대회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가족 간의 갈등, 고민, 성장을 이야기한다. 린아이의 시선을 통하여 가족에 대해 되짚어 보고 싶을 때, 혹은 인간관계 전반에 내재한 본질적인 어려움을 공감받고 싶을 때, 원망스럽고 미운데 사실 이해하고 사랑하고픈 존재와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길, 조심스레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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