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난 Jun 10. 2023

총기 없는 군인

영화 '핵소 고지'를 보고

주님, 부디 제가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핵소 고지, 데스몬드 T. 도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핵소 고지'는 비폭력주의자인 주인공, 데스몬드가 군에 입대하여 핵소 고지의 전투를 치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어떠한 폭력도 저지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군에서 총기 사용을 거부하는 데스몬드는 상부, 그리고 동료에게 질타받으며 군 생활을 견뎌낸다. 데스몬드가 자발적으로 군에서 나가게 하기 위해 상부에서는 부러 데스몬드가 속한 부대를 핍박하고 이에 분노한 동료들은 어둠을 틈 타 데스몬드를 집단폭행하기도 한다.


 총기 사용, 혹은 퇴출을 강요당하며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와중에도 데스몬드는 끝내 군을 떠나지 않고 이후에는 총기 없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의무병으로서 핵소 고지 전투에 참여한 그는 앞서 나아가는 동료들을 지원하며 부상자를 치료한다. 뛰어난 실력과 용맹함으로 선전하는가 싶던 부대는 일본군의 저돌적인 행태에 결국 후퇴한 후 방책을 찾기로 결정한다. 후퇴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진영으로 달려가는 군인들. 그러나 그 뒤에는 부상으로 인해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이들이 남아있었다.


 진영으로 돌아온 수뇌부는 핵소 고지에 남은 생존자를 데리고 올 것인가, 다음 지원군이 오기까지 대기할 것인가로 언쟁이 오가고 있는 상황. 그 상황에서 데스몬드는 홀로 핵소 고지로 향한다. 몸을 낮추어 곳곳에 쓰러진 사람들의 호흡을 확인하고 숨이 붙어있는 자를 둘러업고 벼랑 끝으로 향한다. 아군 진영에 가기 위해서는 꼭 내려가야 하는 벼랑 끝. 길게 이어진 밧줄을 저의 몸과 부상자의 몸에 감아 서서히 그를 바닥에 내린다. 무사히 아래로 내려간 것을 확인한 후에는 다시 핵소 고지로 향했다. 살아있는 자들을 사살하기 위해 온 일본군의 눈을 피해 동굴을 기고 호흡을 감추며 그렇게 한 명, 한 명 총 75명의 생존자를 구해낸다.


 떨리는 손과 감각이 없어진 다리.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감추며 한 명만 더 구할 수 있길, 한 명만 더 함께 갈 수 있길 바라며 계속해서 적진으로 향한다.


 사실 전쟁에 나서며 '죽이기 위한 전투가 아닌, 지키기 위한 전투를 하겠다.'는 말만큼 허망한 말은 없다. 내 가족, 내 친구,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그 말은 얼핏 흔한 자기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더군다나 총기를 들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이 고통을 끝내겠다 결심한 다른 군인들에 대한 모욕이자 질 낮은 장난처럼 들리기도 했다. 군에 입대하고 저는 지키기만 하겠다니, 누군가의 피를 뒤집어쓴, 그리하여 저들을 지켜내는 동료들 뒤에서 저 혼자 고고히 머물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멀겋게 웃으며 "저는 총기 사용을 안 해도 된다고 듣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마저 헛웃음이 나게 하는 것이었다.


 


살면서 너한테 만큼 색안경을 끼고 본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날 용서해 주길 바란다.
-핵소 고지, 캡틴 글로버-




 그래서 손에 끈을 두르고 바닥을 기며 비틀대면서 시체를 뒤지는 그의 모습을 봤을 때, 차마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연중에 그의 생각이 현실을 모르는 이의 맹랑한 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버렸기에, 차마 어떠한 숨도 뱉어낼 수 없었다.


 과학자로 인해 기술이 발전하고, 의사들로 인해 생명을 연장한다. 생산공장의 직원들 덕분에 오늘의 삶이 더 간편해지며, 농부들로 인해 양식을 얻는다. 선생님들은 아이에게 미래를 전하고, 가수는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채롭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랬기에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받았던 무수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바랐다.


 오랜 기간 동안 습관처럼 그렇게 떠들어대 놓고 어째서 전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곳에는 단 한 가지, 한 형태의 삶밖에 없다고 믿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에 잃지 말아야 할 마음이 있음을, 왜 잊어버리고야 말았을까.



내 신념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그런 내 자신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죠?
-핵소 고지, 데스몬드 T. 도스-



 핵소 고지에서의 그 밤 이후, 데스몬드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은 확연히 달라졌다. 계속해서 죽어 나오는 동료들의 시신과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 죽음을 두려워 않는 일본군. 지쳐만 가던 그들의 눈에 새로운 빛이 도는 순간이었다.


 끝까지 날 포기하지 않아 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가 그들이 다시 한번 핵소 고지로 향할 수 있도록 한다.


데스몬드를 기다리는 군인들


 핵소 고지의 전쟁묘사는 꽤나 생생하다. 떨어지는 살점, 부식된 신체와 신체를 갉아먹는 벌레들. 비위가 안 좋은 사람이라면 토하지 않을까 고민되는 장면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어떠한 전쟁 이야기도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전쟁도 그 자체로 선망받아서는 안된다.

 먼 이야기여서 우습게 지껄이는 전쟁이 얼마나 추하고, 잔혹하고, 아픈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게 그 시절을 지나 오늘을 만들어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희망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핵소고지에 참전한 데스몬드 도스


매거진의 이전글 To Infinity and Beyon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