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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식

by 노미화

우산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주변은 온통 불투명한 잿빛이다. 비를 맞는 감각은 없지만 비가 오는 풍경 속이고, 나는 걷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무런 의식도 없는 발걸음이 멈춘 순간,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집에 들어가야겠구나. 내 발걸음이 원한 곳은 집이구나. 생각이 미치자마자, 두 발을 딛고 있던 바닥이 갑자기 바뀐다. 어느새 실내다. 어렴풋한 조명, 익숙한 공기, 익숙한 가구. 집인가 보다. 비를 맞아서인지 몸이 무겁고 피곤하다. 몸을 짓누르는 빗물의 무게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피로감이 가슴께에서부터 목을 넘어, 눈꺼풀까지 덮쳐온다. 터벅터벅 몇 발자국 걷다 욕실에 도착한다. 커다란 욕조에는 물이 반쯤 차 있고, 뜨거운 물이 천천히 받아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옷을 벗기 시작한다.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축축함이 피부에 달라붙는다. 왼쪽 손바닥을 무심히 보다 볼록 튀어나와 있는 검은 점 같은 것이 서너 개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점들이 꿈틀거린다. 본능적으로 손톱을 세운다. 툭 튀어나온 점 하나 잡는다. 꿈틀. ‘뭐지?’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손톱으로 잡은 그 '이상한 것'을 뽑는다. 쭉-. 가늘고 기다란 것이 달려 나온다. 악! 기생충? 손끝이 얼어붙는다. 소름이 돋는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쳐 나온다. 이건 공포도, 혐오도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다. 떨리는 손으로 뽑아낸 것을 재빨리 욕조 안에 휙 던진다. 미끈한 그 물체는 떨어지지 않으려 검지손을 감으려 한다. 나는 절규하듯 괴성을 지른다. 발을 동동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그것을 욕조에 던진다. 물 위에 꿈틀거리는 것이 여간 징그러운 게 아니다. 아직 손바닥에 두어 개가 남았다 생각하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떻게'의 연발. 그 순간, 옆구리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올라온다. 순간 나는 힘줄인 줄 알았다. 하지만 힘줄은 어디론가 향하는 것처럼 굼실거리며 움직이고 있다. 소름 끼치는 그것들이 온몸에 퍼졌구나. 나는 경악을 넘어 절망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나는 욕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욕실에는 이미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찬다. 뜨거운 김이 내 눈을 덮고, 피부를 삼키고, 숨을 앗아간다. 수증기의 입자처럼 내 몸도 분해되었으면. 흩어졌으면. 그래서 내 몸에 있는 이것들도 함께 산산조각 났으면.


꿈에서 깬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머리도 지끈거린다. 마치 그 기생충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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