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미용실에 갔다.
우리 가족모두의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실 선생님이 겨울이를 궁금해하며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서 이야기 끝에 묻는다. 그럼 겨울이 엄마는 겨울이 없는 날동안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골프도 배우고 혼자 영화도 보고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영어공부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집에 와서 봄맞이 이불빨래를 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은 날씨에 창밖에 푸른 나무빛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기분이 좋았다.
귓속에 버즈에서 벨소리가 들리고 핸드폰엔 '우리 아들콜렉트콜'이라는 발신자가 표시되었다.
겨울이에게 전화가 오면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응'하는 아들 목소리에 나는 키패드의 아무 번호나 누르고, 뛰는 가슴을 누르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와 통화를 했다.
겨울이는 요즘 이유 없이 불안해진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인지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다.
괜찮다고 잘할 수 있다고 못해도 된다고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라고 톤을 높여서 말하고 파이팅을 외치며 전화를 끊었다.
내 마음이 두려움의 폭풍으로 휘몰아친다. 불안을 넘어 공포감이 엄습하고 눈물을 꾹꾹 누르며 화분을 옮겨 물을 줬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 매일아침 해야만 하는 카톡과 전화통화들은 수없이 많았다. 제대로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면 겨울이는 어디도 나갈 수 없었다.
겨울이는 1학년때 anxiety disorder를 진단받았다.
(anxiety disorders: 이유 없이 불안을 느끼거나 불안의 정도가 지나친 정신장애)
그의 불안은 작게 크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인간의 불안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이 된다.
화를 내는 상사도, 애정을 갈구하는 애인도, 냉소적인 사람도, 계획적인 사람도, 남을 웃기게 만들고 싶은 사람도 결국 불안이 밑바탕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불안의 씨앗이 결국 그 아이에게로 가서 자란 건 아닌지 나는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있다. 그리고 그의 불안이 만들어놓은 사건들에 부모로서 또 대응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들에 대한 피로감이 있다. 두려움이 있다.
겨울이를 행복한 아이로 기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원래 인간이란 행복한 존재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나는 내 아이는 그렇게 기르고 싶었다.
내 엄마처럼 자식을 기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며 버틴 세월인데 결국 그렇게 자란 나보다 내 아이가 더 힘든 상황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모체는 종족보존을 위해 새끼를 보호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내 DNA에 화학적 문신으로 그렇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이는 부모의 대체물이 아니라고 한다. 나의 세포로 나의 유전자를 받아 내 몸속에서 튀어나온 아이가 내 대체물이 아니라고 한다. 엄연한 다른 인격체로 존중하라고 한다.
그러니 그 얼마나 어려운 미션인가. 모성의 본능을 가진 모체가 내 몸속에서 나온 아이를 나와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바라보며 여기저기 부딪히며 가는 그의 삶을 보면서 의연하게 견뎌야 하는 게 원래 가능한 일인가. 종교인의 수행보다 힘든 일 아닌가.
자칫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나는 살인을 하는 마더의 김혜자가 되어있을 것이고
또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우리 아이는 캐빈에 대하여 캐빈처럼 친구들과 아버지를 죽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외줄 타기를 어떻게 편하게 할 수 있는지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