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ny C Nov 22. 2023

그리스도의 계시 4

4th, 하늘상급 3

하늘 상급



어린양께서 주실 심판의 권세

'얼굴이 사람 같은 셋째 생물' 2021

[요한계시록 2장 26~28절] 

"신앙의 승리자[이긴 자]와 끝까지 내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그가 쇠막대기로 그들을 다스리고, 질그릇처럼 그들을 던져 부숴 버릴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 받은 권세도 그와 같은 것이다."

"내가 또 그에게 샛별을 주겠다."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는,

'지상의 모든 나라' 곧, 아담에서부터 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었고, 있고,  있을 모든 나라와 권력 그리고 그들이 자행한 악을 멸하는 '어린양의 지상 심판'에 동참할 권세입니다. 

때문에 '다스린다'는 표현에 덧붙여 '쇠막대기로 다스리고, 질그릇처럼 던져 부수는 파괴적인 심판권'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치, 주께서 행하시는 지상의 모든 교회사역[works]에 헌신된 성도를 세워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함께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것처럼, 어린양의 심판 때에도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사명과 능력을 주셔서 그들과 함께 주님의 심판을 이 땅에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세상의 모든 정의가 사회적 약자에게 일시적인 위로는 되어도 끝까지 지켜주지는 못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지 못했고, 재차 악에 물들어 손상만 입혔을 뿐입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려는 의지로 군대를 일으켜 큰 승리를 쟁취하고 일시적으로나마 민중을 위로하면서 큰 지지를 받았지만, 그 결과는 국왕 찰스 1세의 처형과 함께 독재체제를 수립해 의회를 탄압하고 민중을 옥죄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무덤은 파헤쳐져 부관참시당하고 유골은 민중들에게 짓밟혔습니다. 그의 청교도 신앙이 하나님의 공의를 향한 의지였음이 분명하다 해도 그의 군대와 정치 행보는 하나님의 공의와 동떨어져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자들의 인간적 정의도 그러했는데, '인본주의를 배경으로 한 세속의 정의'는 더욱 가혹했습니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을 긍휼의 마음으로 감싸며 '자본론', '공산당 선언' 등 많은 사상서적과 경제서적을 출간한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철학과 사상이 애민정신에 목말라했을지라도, 스탈린에 이르러서는 '권력 쟁취와 독재 유지를 위한 단순 살육의 명분'이 되었고 '2천3백만 자국민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그에 더하여 중국의 마오쩌둥은 '근 5천만에서 8천만'에 이르는 자국민을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공산주의를 명분으로 학살했습니다.

히틀러가 죽인 '1천7백만 희생자'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소멸시킨 인구에 비하면 아주 가볍게 볼 정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정의에 의한 학살은 단지 그 셋에서 그치지 않았고, 혁명기 이후 19세기부터 벌어진 거대 전쟁들과 독재자들의 무참한 학살의 역사는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기만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인구는 5천만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했던 지난 세기를 말하자면, '붉은 말과 그 위에 탄자가 받은 큰 칼이 죽이는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적 정의'가 번번이 항상 악에 빠지면서 손상시킨 하나님의 공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우는 성취가 '어린양께서 주실 하늘 권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만 알면서 영생하도록 지음 받은 사람에게 악을 알게 하여 죄인으로 전락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사망이 사람을 죽이도록 이끈 악의 근원' 곧, 옛 뱀과 사망과 그의 권세와 그의 무리들과 그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행항하시는 '회복된 하나님 공의에 의한 보복'입니다. 

즉, 지음 받은 사람을 향한 보복이 아닌 '근본 악의 실체에게 행할 심판'입니다.

그 권세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받으신 권세'라고 하시며, 그러한 권세를 '첫째 부활로 살아난 이긴 자들에게 상급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약자들도 다를 바 없지만, 지상에서의 성도는 때리면 맞고, 쫓아내면 쫓겨나고, 죽이면 죽임 당하는 '무력하고 억울한 희생과 순교의 삶'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선을 행하는 자나 악을 행하는 자, 누구 할 것 없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에 더하여 지속적인 손상까지 입혔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죄인'이고, 그것을 명분으로 삼은 오랜 악의 권세와 사망은 잔혹하며 억울한 죽음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횡포에 놀아나고 죽임 당하는 성도의 연약함에 비하면, 그런 연약함 가운데 죽어진 성도가 '이긴 자'가 되어 받게 될 '어린양 그리스도 심판의 권세'는 비할 데 없이 큽니다.

몸도 마음도 약해빠진 현실에 익숙한 우리가 어떤 극악무도한 한 죄인을 심판하는 것도 아니고, '온 세상의 악을 심판할 것이라는 주님의 그 계시'는 너무 커서 선 듯 믿어지기보다는 되려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비유하자면, 스탈린에게 희생당한 한 어린 양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 하늘 권세를 받고, 스탈린만 아니라 그와 동조한 모든 권력을 심판한다는 것이고, 그에 더하여 어린양의 심판자리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사실 필자의 작은 믿음으로는 참 어렵습니다. 

다만, '믿지 못하는 것이 죄라' 하시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주께서 하신 약속이니, 주께서 이루실 줄을 다만 믿는다' 고백할 뿐이며, 온 우주 만주의 주되신 어린양께서 이루지 못하실 일은 전혀 없음은 아무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아멘.

그 간극을 이해 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람의 타락 이전의 실체와 이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부연해 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며

'불순종에 의한 타락과 범죄, 그에 따른 육체의 사망에 관한 성경 기록은 '창세기 6장 3절'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shall not always strive], 이는 그들이 육체[is flesh]가 됨이라."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본능에 따라 살다 죽는 자연인'이라는 말이며 하나님의 신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그들의 모든 자손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그 기록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이며 사람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타락한 영적 정체성을 보시고 한탄하신 사람에 대한 정의[define]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선을 상실한 사람의 본성'은 '탐심에 의한 죄를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연인[flesh]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영이 거하며 영생하는 생령'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became a living soul]이 된지라."


그러므로 '육체가 무엇이고 생령이 무엇인지'는 의미 깊은 묵상의 화두입니다. 

요점만 간단히 하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며 영원한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니면, 자연계의 다른 동물과 같이 '본능에 따라 살다가 죽어가는 자연인'인지를 구분하는 용어입니다. 


즉,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이 거하는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만물의 통치자였습니다. 또한 지금은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엘을 통해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교회에 보내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요엘 2장 28절'

"그 이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승천하시기 전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과 그분이 하실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그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믿는 모든 자의 심령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몸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강조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리고, 성도의 부활 이후에는 지금의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완전하게 회복될 것'을 전지전능하신 주께서 하늘 상급들을 통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6장 3절 [KJV], And the LORD said, My Spirit shall not always strive with man, for that he also is flesh; yet his days shall be an hundred and twenty years.

이 기록에 대한 한글 번역이 중구난방인데, 문장의 의미를 분명하게 정립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하나를 설명하는데 만도 장문의 글이 필요할 것이지만, 긴 글이 오히려 단순한 의미를 왜곡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더 깊이 살피며 성령님의 가르침을 구할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의 악함에 대하여 다윗이 '시편 53편'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인간을 굽어살피시며 지혜로운 사람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보려 하셨으나, 다 잘못된 길로 갔으며 하나같이 더러워졌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도 없구나.'

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 본인 역시 그러함을 자인하며 한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천여 년 후, 사도 바울은 '다윗의 고백'을 인용해서 말합니다. 

'로마서 3장 9~12절'

'~ 우리가 이미 선언한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같은 죄인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된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 진리에서 떠나 쓸모없게 되었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느니 하나도 없다.'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착하거나, 선하거나, 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간혹, 어쩌면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착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사는 사람, 또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위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선과 의가 평범 이상의 인간적 한계를 넘었을 때, 그런 이들을 예로 들면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없다 하는 하나님의 한탄'이 틀렸지 않냐고 물어봅니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과 의'는 사람의 것과는 다릅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에게 있던 선과 의' 또한 타락 이후의 상태와는 전혀 다릅니다. 

필자는 아무래도 그 지극한 선과 의를 알지 못하고, 행한 적도 없어서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규정하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영광'이라고 까지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지극의 선과 의가 상실되어 사람에게 이른 것이 '사망'이며 그 사망의 속성은 '허무'입니다.

그러므로 '쓸모없게 되었다'는 표현은 용도를 상실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허무한 존재가 되었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결국 죽어버릴 자연인에게 있는 운명론적 허무'이며, 그런 허무한 존재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의인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솔로몬의 전도서'에 '죽음 앞에 있는 인생의 허무'를 실제적으로 묘사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차지 아니하도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의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결국 사망 아래에 있는 사람은 죽어가면서 행하는 그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불순종에 의한 사망을 이길 '둘째 아담의 순종'이 반드시 있어야 했고, 지극의 선과 의를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예언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야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순종은 '모든 아담 자손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올라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오심으로 인해 죄인이 주님의 부활을 믿어 다시금 '하나님의 공의 앞에 참된 의인으로 설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인으로 성장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임 당하는 그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에 동참함으로 '주께 받은 의를 본인이 확증하는 길'입니다. 

그와 같이 의인으로 살다가 죽으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그도 부활할 것이며, 주께서 '신앙의 승리자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 앞에 완전하며 영생에 이른 자에게는, 더 이상의 환란이나 고난에 대한 인내나 견딤은 필요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는 첫째 부활에 참예하고 영원한 생명과 함께 '어린양의 심판을 함께 행할 그리스도의 권세' 또한 상급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샛별 [the morning star]

주께서 요한에게 임하실 때 오른손에 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angels]'를 뜻합니다.

그리고, '22장 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 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the bright and morning star]이라. 하시더라." 

계시록의 이 말씀에서 광명한 새벽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샛별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상급이 되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샛별에 관해서 명확한 것은 많지 않고, 그래서 '샛별은 무엇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모습은' 안다 할 수 있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느낀 거룩한 인격도' 안다고 할 수 있지만,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주님의 참모습'은 필자로써는 도무지 안다고 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주님을 다시 뵙게 되면 그때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멘.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스도의 계시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