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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C Nov 22. 2023

그리스도의 계시 5

5th, 하늘 상급 4

하늘 상급



신앙의 승리자로 인정받는 상급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은 넷째 생물' 2021

[요한계시록 3장 4절] 

"그러나 사데에는 죄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흰 옷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가장 먼저 자각한 것은 '벌거벗은 나체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린 것을 안쓰럽게 보신건지, 주께서는 지으실 때 기뻐하셨던 한 생명을 거두어, 그것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세기 3장' 

7절,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21절,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그와 같이, 사망의 저주는 '거룩하게 지음 받은 육체와 그 벗은 몸을 부끄럽게 인식하는데서 시작'되고, '옷은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에서 그 성경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가죽옷은 '어떤 짐승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하신 하나님 말씀대로라면 아담과 하와가 죽었어야 할 것을, 한 짐승이 대신 죽어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의해 그들만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만물에도 사망의 저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짐승의 주검은 '희생제물, 대속제물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후 아벨은 '양 치는 목자'가 되었고, 그는 '양의 첫 새끼를 죽여서 얻은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릴 첫제사의 제물'로 삼았고, 주께서는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부활 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주님의 양을 치고 먹이라 하신 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의 희생제사를 시작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소, 양, 염소, 비둘기와 같은 짐승들의 피를 받으시면서 사람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사의 제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이를 묵상해 보면, 아벨이 양을 제물로 드린 일, 그리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한 이름이 '어린양'이란 근거를 통해서, 그날에 에덴에서 처음 죽어진 짐승이 '어린양'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바로 죄인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옷'이라는 의미가 되고, 어린양의 계시 속의 하늘 상급인 '그 흰 옷도 그리스도'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 의미를 이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이 주님의 살이며 피'라고 하면서, 먹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30절'

"그들이 먹을 때 예수님은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자,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니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것으로 마시는 그날까지 내가 결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서 감람산으로 갔다."



흰 돌 & 흰 옷 & 예복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이긴 자의 흰 옷'이 되심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대속 즉, 

'그의 선하심이 완전무결하며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모든 사람의 원죄와 그 원죄로 인해 저지른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진 희생제물 어린양이 되어 죽임 당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는다'

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거룩하게 지음 받은 사람의 몸은 결국, '죽어지는 허무한 운명'에 떨어졌고, 그의 후손이 저지른 모든 악행은 거룩하게 지어진 세상에 '탄압과 분쟁과 전쟁에 의한 파괴'가 만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은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간 자에게 그 몸이 한 번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해서 '운명의 허무에서 벋어 난 영원한 생명의 진리라는 영광'을 얻도록 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며 진리 되신 분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분의 구원에 이른 자는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 됨의 의미를 담은 용어가 '영접'이며, 세상에서 그 영접의 예식은 '세례'입니다.

그 세례는 다시 최후의 심판 이후에 있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완전해집니다.


어린양의 마지막 심판에 앞서 이긴 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선포하시고 그 증표로 '흰 돌'을 주실 것입니다.

그 흰 돌은 받은 자에게 또한 '흰 옷'을 입혀주실 것인데, 그 옷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큰 슬픔 가운데 입혀주셨던 가죽옷과는 정반대 의미의 옷이며, '그리스도께 죄 사함을 받아 완전한 선과 영원한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을 큰 기쁨 가운데 온 세상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상징입니다.

그 흰 옷은,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라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를 묘사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기록한 그의 서술을 보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누구든 아무 차별 없이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유업 즉, '복의 근원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축복에 참예하는 자'라고 증거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29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 선생님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경계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를 단지 '구원'에만 둔 자가 되어, 그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는 방심' 때문에 저지르는 모든 범죄입니다. 즉, '그 거룩한 영광에 맞는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2~14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바울의 그 가르침은, 마태복음 22장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진수성찬을 차리고 하객들을 초정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분노한 임금은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 잔치석을 대신 채웠습니다. 

이 내용까지는 하나님께서 제사장 국가로 세우셨던 이스라엘의 범죄를 비유한 것으로, 하객으로 초청받은 자들은 '유다, 이스라엘'이고, 길을 지나다가 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이방민족들'입니다. 

즉, 이사야서에 기록된 예언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의 세상 만국에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에 대한 주님의 판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1~14절',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 예복은 참석자가 자비로 구입한 것이 아닌, 그 임금이 하객에게 선물로 주는 예복입니다.

그 예복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인 그 '흰 옷'이고 또, '그리스도'인데, 그 거저 받은 선물마저 갖추어 입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임금과 그의 아들과 그의 결혼식을 멸시하는 악행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하면서 그에 걸맞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는 자가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죄와 그 죄를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상실되는 구원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자는 생명책에서 지워질 뿐 아니라, 이후 있을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 주어질 것은 그 비유에서 주님의 판결대로 '최후 심판과 영원한 형벌'입니다.


주께서는, 계시록 3장 4절에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는 표현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또다시 그리스도의 공로를 더럽히는 자'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세상의 악과 사망을 이기는 신앙의 승리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가 다시 그 옷을 더럽히고 있음에도 주께서는 그를 곧바로 내치지 않고 '회개하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또 실제적인 자신의 삶 속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시며, 상실된 모든 것을 주께 구하여 받음으로 생명책에서 흐려져가는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 18절'.

"너는 부자라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너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권하노니, 너는 나에게서 불에 정련된 금을 사서 부요해지고흰 옷을 사서 입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며, 안약을 사서 발라 눈을 떠라."


그 흰 옷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신부가 입는 거룩한 예복'으로 그 의미는 성장합니다. 그 예복의 의미는 지상에서의 삶에서 쌓였고, 부활 후 어린양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쌓인 모든 옳은 행실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입을 예복'으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그 옳은 행실은, 거듭 말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착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의로우심에 따라 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처럼, 필요하다면 의로운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라 죄인이나 악인을 위해서라도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 8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흰 옷을 입혀주시고 함께 다니신다

마치 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 12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니신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에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거닐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런데, 아담, 셋, 에노스 이하, 노아까지 이르는 신앙의 자손들과는 기쁜 추억이 있으셨겠지만, 가인과 그의 자손이 차지한 그 처음 세상은 주님께 끔찍한 상처를 입혔고 참을 수 없는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은 노아와 그 가족들과 함께하시면서 오랫동안 방주를 짓게 하셨고, 그 기간 후에 곧 행하실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자가 있는지 찾으셨지만, 끝내 찾지 못한 주님의 상실감은 세상 아무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텝니다.

400여 년 후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 주님께 지극한 기쁨이 되었겠지만,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우실 때의 그 슬픔은 태워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인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실 때는 경외심과 벅찬 감동으로 드리는 찬양들에 큰 위로를 얻으셨겠지만, 아론까지 합세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난잡한 숭배의식을 행하던 백성들의 그 참람하게 떠드는 소리에 불붙은 여호와의 진노는,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마저 잊게 할 정도였습니다.

광야 40년 간 주님과 함께한 자들이 모두 죽은 후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복주신 저희의 하나님을 곧바로 잊어버린 그 백성을 그래도 안타까워하시면서 붙들어 주셨습니다.

간신히 사무엘과 다윗의 신실한 마음의 중심이 주께 작은 기쁨이 되었지만, 그들과 동행하시면서도 때때로 넘어지는 인간적 연약함을 보시면서 한숨지으셨을 텝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이후, 주께서 세우신 왕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백성들은 세월이 갈수록 복의 근원되신 주님을 잊어갔지만,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맺은 옛 언약이, 하나님의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간신히 붙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이방 나라들에게 짓밟혔고, 그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억지로나마 주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셨겠지만, 끊임없이 타들어가는 슬픔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도 굳은 믿음과 순종을 보인 예레미야, 에스겔과 다니엘 등 여러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미 잊혀 진지 오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주어 담으셨고, 이어서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분들과 함께하시며 주님의 그 슬픔을 사라지지 않을 영영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셨습니다.

멸망 후 70년이 지나 포로 되었던 자들을 유대로 다시 돌아오게는 하셨지만, 그러나 이전과 달리 얼마 남지 않은 저들마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며 주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저들에게 두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비전은 산산조각 났고, 함께하자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저들은 끝까지 뿌리쳤습니다. 

그 피맺힌 슬픔의 400여 년이 흐르고서야 다시 일어서셨고, 포기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늘 영광마저 뒤로한 채, 이 죄로 물든 땅에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그 제자들에게 먹이시고, 주님의 성전을 그들의 심령가운데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주의 살과 피를 먹은 자들이 모여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리, 주님의 사랑이 머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후 300년 간 지속될 핍박 속에서 이어지는 순교자들의 피흘림과 고난에 함께 고통당하셨지만, 그들이 죽어가면서 부르는 찬송에 감격하셨고, 그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는 듯 수많은 기적들을 보이시며 위로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견뎌낼 힘과 지혜를 주시면서, 한 순교자가 흘린 피가 수 천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참혹했던 300년 이후에도 교회를 향한 세상의 핍박은 지속되었고, 그 주체는 로마 황제에서 로마 교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으므로 주께서는 무려 1천 년의 세월 동안 회개의 기회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주셨습니다. 

그 침울한 기간에도 주님의 사랑이 남아있는 교회들을 지키면서, 그들이 동굴에 숨어 성경을 필사할 때에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주셨고, 번역할 때는 통역의 은사를 주셨으며, 기도할 때에 인내의 열매를 주셨으며, 찬양할 때에 하늘 상급을 미리 보게 하셨으며, 전도와 설교의 자리에서는 말씀의 은사를 주셨으며, 그들이 죽임 당할 때에 흘린 피는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들과 항상 동행하시면서 로마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 사라지고 인간적 교훈만 남겨졌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세속 악한 영의 술수와 권력만이 활개를 치고 있을 그때에, 진리를 찾아 몸부림치는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많은 개혁가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서 그들의 걸음걸음을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정신은, 세속 권력과 대치하면서 오히려 저들의 악을 닮아갔고, 살인과 학살과 약탈과 전쟁에 익숙해져만 갔습니다. 개혁이 혁명으로 전개되기 전에는 말씀의 진리가 '약하지만 신실한 자들'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혁가들이 사회-정치적 세력을 가지게 되면서는 그들은 더 이상 약하지 않았고, 힘을 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낮은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높은 마음과 자기의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자신의 정의'를 세우려 분투했습니다. 

그럼에도 주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옆에서 '바르고 좁은 길'을 보이시며 올바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좁은 길을 선택한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숨기시고 복음의 진리가 지켜지고 전승되도록 하셨습니다. 


왜곡된 교리 그리고 현란한 말솜씨를 가진 철학과 사상들이 서로 충돌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개혁과 혁신은 의미를 잃어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곧이어 전쟁의 시대가 열리면서 악은 마지막 발악을 하며 이전에 없던 인구 감소를 야기했습니다. 살육과 거대 전쟁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에도 주께서는 지치지 않고 복음의 진리가 전승되도록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로마가 제국 각지를 연결하는 길이 뚫렸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길을 따라 전파된 것같이, 전 세계를 잇는 땅 위의 길이 닦여지고, 바다와 하늘길이 열리며, 우편, 전보, 전화, 인터넷과 같은 통신 인프라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길들을 따라 지상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거짓 복음과 이단 사상들 또한 참 복음과 뒤섞여 전파되었고, 참 진리와 거짓 교리를 분별하는 안목은 오직 성령님의 양육과 인도하심 속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만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께서 감내하셨던 슬픔과 인내하셨던 진노는 오히려 세속 악한 권력들과 그 추종자들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도록 하셨는데, 그들은 스스로 어린양의 심판을 재촉하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 세대는 그런 전쟁과 환란의 시대를 지나 계시된 재앙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인봉 되어 있던 작은 책, 요한계시록에 담겨 공개된 그리스도 계시의 비밀은, 또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 비밀에 있는 주께서 예비하신 많은 하늘 상급들 중의 하나로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정결한 흰 옷, 즉 성도의 의로운 행위를 인정하는 그 빛난 옷을 주어 입히시고, 그 영광의 이긴 자들과 함께 행하실 모든 심판을 성취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재확인하셨습니다. 

그 상급들을 통해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하셨던 주님의 모든 역사를 추억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추억을 거울삼아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에덴을 거닐었던 것과 같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니셨던 것과 같은 주님과의 동행을 흔들림 없이 소망하고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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