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th, 하늘 상급 10
[요한계시록 3장 4~6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죄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사람[신앙의 승리자]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인정]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축복 & 저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축복의 언약은, '그의 자손이 큰 민족이 되고, 지상의 모든 민족이 그의 자손으로 인해서 복을 받아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함축한 용어가 '복의 근원'이며, 그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그가 '참된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 후, 1천7백 년 뒤에 오신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뒤,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가서 '이사야 61장 1절 이하'를 읽으셨고 기록된 성경 예언이 그분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17~21절',
[이사야서 61장 인용] "~주께서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니.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셨다. 그가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 하고, 짓눌린 사람을 풀어 주며, 주께서 은혜 베푸실 때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그 책을 덮어 회당 직원에게 돌려주고 앉으시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다 예수께로 쏠렸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읽은 성경 말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들은 성령께서 세우신 예루살렘 교회에 이어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선교로 지금의 튀르키예의 지역들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고,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들은 거대제국 로마의 영토에 세워졌고, 3백여 년이 지나면서 로마제국 전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1천2백 년 후, 르네상스의 부흥과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 지구 전역을 향해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축복이 온 땅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의 시작점이었던 이집트에서의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은, 시조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대로 '큰 민족이 되는 길', 본질적으로 말하면 '복의 근원 메시아가 오실 그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시내산에 임재하신 여호와의 바로 앞에서 악을 행함으로 주님의 불같은 진노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6절',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했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그와 같이 모든 이스라엘이 저지른 범죄를 보신 여호와께서는 430여 년 전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마저 잊으신 듯, 모세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백성을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지만, 지존하시며 만군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말리거나, 뜻을 돌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행하시기 전에, 모세에게 먼저 진노하신 주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2장 9, 10절',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의 허락이라도 받으시려는 듯한,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라는 어조는 곧, 모세가 말려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을 비추신 것입니다. 속뜻대로 말하면, '너 모세가 말리지 않으면, 나는 내 뜻대로 행하여 내 백성을 진멸할 것이다.'라는 의미인데, 이는 그 백성의 진멸을 망설이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1~ 32절'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기를,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주옵소서.'"
사실, 모세가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며 간청한 것은, 확실히 부모자식 간의 친밀함이 없으면 결코 부릴 수 없는 극단의 앙탈이었습니다.
그의 일생동안 주님과 함께하면서 경험한 여호와의 권능은 모세의 마음에 크나 큰 경외심을 가지게 했음이 분명한데도 그런 대담한 생떼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극도로 소심해지신 여호와의 그 섬세한 인격과 범죄 한 백성의 죄를 사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심중을 즉시로 읽어냈기 때문입니다.
곧, 크고 높으신 이스라엘의 왕이며 유일한 하나님이기 이전에, 여호와께서는 '지극하신 사랑으로 사람을 지으신 참된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께서는 진노를 참으시고 자기 백성을 품어 진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모세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주의 천사들을 보내 모세를 인도하게 하고, 모세는 그 백성을 이후 40년 동안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명까지 내어 놓은 모세는 살리셨지만, 1천3백 년 뒤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은 사망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은,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를 참으시되 주께서 지정하신 '마지막 심판의 때'가 이르기까지 참으시고, 그날이 이르면 '회개 없이 죄 가운데 죽은 모든 자들을 다시 불러내어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뜻'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3~ 34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하물며, 모세로부터 1천3백 년이 지나서 오신 구주로부터 또 2천 년이 지났음에도 그날은 오지 않았고, 더욱이 아직도 더 먼 듯하고, 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지 못하고 '신은 죽었다'라며 모독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의 말들에 대해서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들과 똑같은 죄인인 내게도 믿음을 주셨고, 늘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살아계심을 내게 친히 증거 하셨으므로,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믿고 믿지 않고는 언제나 개인의 선택입니다. 아멘.'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성도와 교회도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때문에 만만하게 보고, 중2 병에 걸린 사춘기 청소년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일이 많은데, 그러나 모세의 경우와 같은 그런 생떼는 자칫 함부로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필자가 세상살이에 지치고 막다른 길에 내몰렸을 때, 하나님께 그런 생떼를 부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처했던 곤란은 경제적인 심각한 문제가 첫째였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앞으로의 미래가 꽉 막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누가 될까 싶어 두리뭉실 풀어낼 수밖에 없는데, 이는 다만 양해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당시 필자의 미숙한 신앙을 간략히 말하면, 모세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자가 마치,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종으로 인정하신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착각은 어느 때부턴가 선을 넘어버렸고 그 상태로 주께 기도하기를, '제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주께서는 저의 아버지 아니십니까, 아들이 늪에 빠졌는데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라며 그렇게 앙탈에 앙탈을 거듭했습니다. '건져주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데려가 주십사' 교만도 부렸습니다.
'언제 죽더라도 나는 주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근거없는 대담한 착각'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셨던 것처럼 내게 먼저 묻지도 않으셨고, 내 기도는 이웃을 위한 간구도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아닌, 단지 '내 어리석음과 허물 때문에 빠져버린 난관에서 건져 주십사' 생떼를 부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랬던 나와 같은 자들이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한데 더해서 '물을 달라 고기를 달라' 불평들을 늘어놓았다면,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교만에 빠져 그들과 똑같은 불평들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 불순종은, 주께서 나를 처음 영접해 주실 때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 하나를 말씀하셨는데, 20년이 다 되기까지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그 때문에 번번이 지독한 곤란과 낭패를 경험했음에도 버리라 하신 그것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곤란 역시 차곡차곡 쌓인 그 죄들이 중첩되어 당한 절망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범죄와 다를 바 없는 범죄였으므로 당연히 그 곤란에서 구원받기보다는 거지가 되고, 굶어 죽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결국 죽음의 그늘이 덮쳐왔고, 사망의 경계에 서있던 나를 본 의사들은 '곧 죽는다.'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 당일, 같은 시간에 어느 교회의 한 장로님 한 분이 지붕 수리를 하던 중에 떨어져 나와 같은 병원에 실려오셨습니다. 주께서 나는 살리셨지만, 그분은 데려가셨습니다.
중환자실에서 2개월이 지나고 간신히 일반병동으로 옮겨졌을 때, 지병이 있던 한 집사님께서 문병을 다녀가신 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근 2년 후, 물리치료까지 끝났을 때는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떠나버렸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죽음이 왠지 나 때문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왜 부활을 믿지 않느냐?"
그러나, 오래전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불타오를 때의 그 기쁨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후로 부활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물으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몇 해가 지나서 알게 된 것은, '당시 나는 부활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거였습니다. 단순히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던 거였고, 막연한 지식은 믿음이라 할 수 없고, 분명한 지식이 없는 믿음은 맹신인 것입니다. 그런 맹신은 절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었던 겁니다.
당시에 내가 부활을 몰라서 믿음이 아닌 상태로 있었다면, 몇 해 후에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했는데, 그런데 지금 주께서 '부활을 아느냐?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후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해결해 주셨고, 건강이 회복된 후에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런 구원과 회복과 함께 죄에 대한 징벌도 주셨는데, 가벼우나마 힘겨운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장애가 많이 힘겨울 때면, 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살피게 되고, 그래서 그 장애마저 주께서 주신 선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함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네 형편이 이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느냐?' 라며 물었습니다. '네, 믿습니다.'라는 대답 말고는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 내가 자초한 일인 것을 알고 그것이 하나님께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내 대답을 듣고 "믿음이 좋네."라며 비웃었습니다. 함께 예배드리던 이의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조차 하기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