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재 Apr 03. 2024

연분홍 수첩

기적처럼 되찾으니 더 소중한

                                                           

오래된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는 미국에 있는 헤밍웨이 기념관에 가보는 것도 있었다. 그건 문학에 대한 열정을 발산하지도, 버리지도 못하던 내가 꾸었던 막연한 꿈이기도 했다.


그 소원은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바람에 얼떨결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 나는 유학생 뒷바라지와 육아로 정신 못 차리던 30대 중반이었고, 반복되는 일상에 치어 절절매던 참이었다.



미국 영토의 최남단, 쿠바가 빤히 보이는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헤밍웨이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내 기대보다 작고 평범한 주택이었다.


1928년에 쿠바를 처음 방문했던 헤밍웨이는 말년에 줄곧 이곳에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 걸출한 작품을 집필했다. 그가 살던 집은 1968년에 ‘미국 국립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당시 상태 그대로 보존했다. 기념관에는 ‘노인과 바다’ 책이 있는 방을 비롯하여 그가 쓰던 타자기와 동물박제, 9000여 권의 책 등이 있었다.


헤밍웨이 기념관에서 내가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마당에 있는 수영장 가장자리 여러 곳에 파 놓은 작은 구멍이었다. 수영하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할 수 있게 펜을 꽂아 두는 용도였다. 구멍 옆에는 잉크병 자리도 있었다.



그는 집에서도 마치 취재 수첩을 들고 뛰어다니는 종군기자처럼 살았나 보다. 수영하다가도 펜을 잡고 미친 듯이 메모하는 헤밍웨이의 모습을 그려보니, 언뜻 스쳐 지나가는 생각마저 붙잡으려는 치열함이 느껴졌다.


그때 분명히 내 가슴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좁은 우물에 깊은 파문이 이는 소리였다. 나는 지금도 그 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오랫동안 움츠렸다가 모처럼 큰맘 먹고 떠나온 해외여행이었다. 더욱이 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해외심포지엄에는 처음 참가하는 것이라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 준비물을 챙길 때 내가 제일 신경 쓴 것이 수첩이었다.


동네 다이소에 가서 진열된 작은 수첩들을 다 뒤져보고 고심하며 골랐다. 물론 전화기에다 직접 메모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손글씨가 훨씬 더 빠르고 편하다.


수첩이 너무 크면 휴대하기 불편하고, 너무 작으면 글씨 쓰기가 힘들다. 옆으로 넘기게 만든 것보다 위로 넘기는 스프링 노트가 손바닥에 놓고 메모하기에 좋다.


표지는 책받침으로 활용할 수 있게 단단한 재질이라야 한다. 줄이 아예 없는 백지는 글씨를 똑바로 쓰기 힘들고, 칸이 너무 좁은 것도 불편하다.



연분홍 수첩


마침내 손바닥 위에 놓고 쓰기에도 만만한 크기에다 줄 간격도 적당하고 페이지도 넉넉한 것을 찾았다. 겨자색과 연분홍을 놓고 한참을 더 저울질한 끝에 연분홍으로 골랐다. 천 원짜리 수첩 하나 사면서 엄청나게 품을 판 셈이다.




스페인 세비야 성당 안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받아적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볼펜을 끼워서 분명히 넣어둔 연분홍 수첩이 없어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어둡고 낯설고 사람 많은 곳에서 잃어버린 터라 더 난감하다. 구경이고 뭐고 다 부질없고,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평소 웬만한 건 잃어버려도 무덤덤하게 넘기던 나답지 않게 도무지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인솔 가이드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분명 성당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있었으니 역순으로 돌아다니며 샅샅이 찾아볼 심산이었다.


우선, 입장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벤치부터 가봤다. 수첩은커녕 대기하는 관람객도 하나 없이 휑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내가 들어갔던 칸뿐만 아니라 모든 쓰레기통을 샅샅이 다 뒤져봐도 없다. 황망하고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젠 다 틀렸다. 12일 여정 중에 겨우 3일 지났는데 어쩌지? 지난 일정은 물론 앞으로 남은 여정도 기록할 수가 없다. 물론 스마트폰 메모장을 활용하면 되겠지만 종이에다 펜으로 휘갈겨 쓰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모든 걸 다 망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낙심하고 있는데, 성당직원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고 쑥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어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 조금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그녀의 눈빛이 맑고 상냥하다.


나는 헛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 혹시 여기에 작은 수첩이 떨어져 있는 것 보신 적 있으세요?

  - 핑크?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핑크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 네, 맞아요. 표지색이 핑크에요.

  - 여기서 습득한 것이 하나 있어요. 그거 우리가 잘 보관해 두었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찾으시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습득물 보관소는 성당 출입문 밖에 있었다. 나와 동행한 여자가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자, 철문 밖에서 나이 지긋한 사람이 듣고 무언가를 높이 들고 흔들며 다가왔다.


가까이 보니 내가 고심 끝에 고른 그 수첩이 맞다. 나는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기적처럼 되찾으니 더 소중하다. 가슴이 떨리도록 감격스럽다. 이건 절대로 천 원짜리가 아니다.


이번 여정의 모든 순간을 더 치열하게 관찰하여 연분홍 수첩에다 모두 기록하라는 뜻인가?


성당 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언뜻 스쳤다.   

   

작가가 관찰을 멈추면 끝장난 겁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관찰할 필요도 없고, 그게 어떤 쓸모가 있을지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 어네스트 헤밍웨이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