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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너, 참 많이 놀랐지?

행정실 출입 전엔 심장에 방탄조끼 착용

by 지훈쌤TV

신규 교사였던 저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막막했던 건 ‘예산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필요한 물품을 신청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선 계획서를 작성하고, 교감·교장선생님께 구두로 보고한 뒤, 마지막으로 ‘그곳’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바로 행정실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행정실장님은 참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계획서를 들고 조심스럽게 행정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그럼 이렇게 한번 해보는 건 어때요?” 하고 함께 해결책을 고민해 주셨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저는 행정실에 가는 일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요청한다기보다는, 함께 일하는 동료를 찾아가는 느낌이었거든요.


하지만 얼마 후 새로운 행정실장님이 오시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육청에서 근무하시다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예산을 다루는 데 있어 굉장히 예민하고 까다로우셨습니다.


한 번은 교내 행사 계획을 짜고, 교감·교장선생님과 논의를 마친 후, 평소처럼 행정실장님께 계획서를 들고 찾아갔습니다.


서류를 한참 들여다보시던 실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이게 맞아요?”


어안이 벙벙해진 저는 얼떨결에 “계획서에 잘못된 부분이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실장님은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씀하셨습니다.


“상품으로 도서상품권을 주는 게 교육적인 게 맞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제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건가 싶어 당황스러웠고, 어딘가 모르게 면박을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조사해서 준비한 것이었지만, 제 의도나 맥락은 보려 하지 않고 단정 지으시는 말투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조금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행정실을 나왔습니다.


걸음을 옮기면서 괜스레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날은 텅 빈 교실에서 혼자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앉아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라면, 상품 선정이 행사 취지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한번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마치 ‘윗사람에게 혼난’ 기분이었고, 그 감정은 오랜 시간 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작은 학교일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업무가 많았기 때문에 매번 찾아갈 수밖에 없었고, 예산 품의를 할 때마다 한소리씩 듣다 보니 참을 인(忍) 자를 마음속에 수십 번 그리며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른 선생님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고, 어떤 분은 행정실에서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수록,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분은 어떤 철학을 가지고 계셨던 걸까?

그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된 마음이었을까?


저는 교직생활 10년 차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왔습니다.


그중에는 너무 잘 맞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전혀 결이 다른 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 사람을 피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소통을 시도하기보다는, 감정을 삼키며 조용히 거리를 두곤 했지요.


10년 전의 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한 번 행정실장님과 진심을 담아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어쩌면, 그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무엇인지 알게 될 수도 있고, 그것만 존중해 줘도 관계가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몰라.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 실수도 당연한 거야. 그러니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말고, ‘왜 그러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 번쯤 더 다가가 보는 용기를 내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참느라 지쳤던 그날들 대신, 조금은 더 부드럽고 단단한 날들을 마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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