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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만 사용하는 이유

친절에도 안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by 지훈쌤TV

정보부장이 되고 가장 난감했던 일 중 하나는 컴퓨터 관련 민원이었습니다.


모니터가 안 나온다, 전원이 안 켜진다, 와이파이가 안 된다….


기기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어김없이 전화가 울리고 쪽지가 쏟아졌습니다.


컴퓨터교육과를 나오긴 했지만, 사실 컴퓨터에 대해 배운 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의 부탁을 외면하기 어려워, 검색을 하며 방법을 찾고 직접 본체를 분해하던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학교를 방문하는 용역업체 사장님은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래, 이런 일도 겪어야 내가 자라겠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전원을 뽑았다가 다시 연결하고, 모니터 전원을 켜드리면 선생님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야, 선생님 손이 약손이네. 내가 할 땐 안 되더니 선생님이 하니까 되네.”


웃으며 교실을 나왔지만, 속으로는 조금 씁쓸했습니다.

‘이런 건 한 번쯤 시도해 보고 불러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넘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생님이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전 학교에서 듀얼 모니터를 썼는데, 하나로 하려니까 너무 불편하네. 나도 듀얼로 좀 해주면 안 될까?”


듀얼 모니터 설치에는 분배기, 케이블, 전선 정리 등 작은 수고들이 필요합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빈 교실에 들어가 낑낑대며 모니터를 옮기고, 먼지가 잔뜩 낀 본체에 분배기를 연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케이블을 정리하려다, 너무 촘촘히 묶인 케이블 타이를 자르기 위해 커터칼을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순간, 칼이 미끄러졌습니다.

피가 솟구쳤고, 손끝이 둔하게 저렸습니다.


보건 선생님께서 급히 상처를 소독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신경 손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 바로 병원 가야겠어요.”


카풀 당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차가 없던 저를 직접 차에 태워 읍내 병원으로 데려가 주셨고, 그곳에서 다시 광주의 큰 병원까지 데려다주셔서 늦지 않게 신경을 잇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5일간의 입원 끝에 손의 감각을 되찾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날의 아찔한 기억이 남았습니다.


놀라서 달려온, 그 당시엔 여자친구였던 아내와 가족들에게 “괜찮아, 내 부주의야.”라며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날 이후로는 커터칼을 잡는 일이 두려워졌고, 가위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상처는 제게 중요한 깨달음을 남겼습니다.

모든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성실함’은 아니란 걸요.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내 몸을 돌보지 않는 일은, 결국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요.


무엇보다도 그때 저를 위해 직접 차를 몰아주신 보건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분의 판단과 온기 덕분에 지금의 제 손이 있습니다.


이제는 바랍니다.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본연의 일 외에 이런 위험한 잡무로 고생하지 않기를.

누군가의 ‘약손’이 아니라, ‘안전한 손’으로 하루를 보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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