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캐너먼 교수가 알려주는 친숙함과 가독성의 효과
인살롱 기고 원문 링크 : https://social.wanted.co.kr/community/article/115445
우리 뇌에는 두 명의 운전자가 있습니다.
한 운전자는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 1(Fast Thinking)이라는 운전자입니다. 다른 한 명은 느리지만 논리적인 시스템 2(Slow Thinking)라는 운전자에요. 시스템 1은 마치 자동차의 자동변속기 같아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빠르게 작동합니다. 반면 시스템 2는 수동변속기처럼 의식적인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죠.
문제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판단을 시스템 1에 맡긴다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시스템 2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저절로 작동하는 시스템 1 사고를 하고 있다는 거죠.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입니다.
저자인 대니얼 캐너먼(Daniel Kahneman) 교수는 고전경제학의 프레임을 뒤엎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분입니다. 학술적 연구를 대중적으로 풀어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의사결정이 직관(System 1)과 논리적 사고(System 2)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설명했습니다.
대니얼 캐너먼 교수는 심리학과 경제학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의 비합리성과 그에 따른 의사결정 연구를 주로 하셨죠. 2024년에 90세 나이로 작고하셨는데 스위스에서 스스로 조력 사망을 선택해, 이 '최고 의사결정 전문가의 마지막 결정'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끼고 계신가요? 편안함일까요, 아니면 압박감일까요?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는 다소 생소한 인지적 편안함(Cognitive ease)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지적 압박감(어려움, 불편함 등)을 줄이면 내용의 설득력이 높아진다는 건데, 더 쉽게 말하면 어렵게 느끼면 설득력이 떨어지고, 쉽다고 느끼면 설득력이 높아진다는 얘깁니다.
핵심은, 시스템 1 사고 덕분(?)에 이해하기 쉬운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는 것이죠. 실제 연구의 실험 결과를 보면 같은 내용이라도 읽기 쉬운 폰트로 쓰인 문장을 사람들은 더 진실하다고 판단합니다. 발음하기 쉬운 이름의 주식 종목이 더 좋은 성과를 보이기도 하죠.
이는 우리 뇌의 '인지적 편안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뇌가 정보를 처리하기 쉬우면 긍정적 감정이 생기고, 처리하기 어려우면 경계심이 생깁니다. 마치 맑은 날씨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죠. 깔끔한 서체로 인쇄된 문장, 반복된 문장, 발음이 쉬운 단어 등은 인지적으로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캐너먼 교수의 실험에서도, 학생들에게 복잡한 폰트와 단순한 폰트로 운동 프로그램을 소개했을 때, 단순한 폰트로 본 학생들이 그 운동을 "더 쉽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같은 운동인데도 말이죠.
1960년대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단어를 반복해서 보여주면, 처음엔 낯설어하던 단어를 나중엔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단순 노출 효과'라고 부르죠.
우리는 친숙한 것을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친숙함이 가진 '과거성'이라는 강력한 특성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과거성'을 예전 경험이 직접 투영된 결과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여러 번 봤던 것은 최소한 해롭지 않다는 증거니까요. 이는 생존에 유리한 전략이었습니다.
광고에서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는 이유, 히트곡이 계속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유, 정치인들이 같은 슬로건을 되풀이하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친숙함은 호감으로, 호감은 신뢰로 이어지거든요.
1978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지심리학자 Herbert Simon 교수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경제학에서 바라보는 인간(Econ)과 현실의 사람(Human)이 다름을 보여주었죠. 결국 우리 인간은 아주 이성적이지도 않고, 아주 논리적이지도 못하며, 늘 일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우리 인간에게 "더 잘 들리고", "더 잘 읽히는", "설득력 있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캐너먼 교수는 우리에게 실용적인 조언을 줍니다.
첫째, 가독성 높은 폰트를 사용하세요. 특히 중요한 메시지일수록 고품질 종이에 또렷한 색상 대비로 인쇄하는 것이 좋습니다. 줄 간격이나 문단 구성도 중요합니다.
둘째, 기억하기 좋게 표현하고, 가능하면 운율을 맞추세요. "Woes unite foes(고난은 적을 결집시킨다)" 같은 표현이 더 기억에 남고, 통찰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셋째, 신뢰할 만한 출처를 인용하고, 그 출처를 눈에 잘 띄게 명기하세요. 내가 신뢰하고 좋아하는 출처에서 나온 내용은 인지적 편안함을 높입니다.
넷째, 가급적 쉽고 간단한 언어를 사용하세요. 간단한 말로도 충분할 때 괜히 어려운 단어를 써서 똑똑해 보이려 하면, 오히려 헛똑똑이로 보이고, 신뢰도를 낮추는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처음 이 시스템 사고의 개념이나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에 대해 접했을 때는 그냥 일반적인 얘기라고 치부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며 나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갈 때쯤 다시 이 책을 꺼내 들어 정독하며 제 삶 가운데 수많은 미스커뮤니케이션 순간들이 떠올렸고, 이내 "좋은 커뮤니케이션의 힘"에 다시금 깊이 공감하게 되었죠.
처음 시작은 아주 심플했어요. 내가 말한다고 상대에게 다 들리는 것도 아니고, 읽었다고 상대가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니, 기왕이면 상대에게 더 잘 읽히고 잘 들리게 쓰고 말해야겠다는 다짐이 전부였거든요. 저는 기본적으로 말이 많아서 "짧게 말하라"는 피드백을 여러 번 들었었기에, 변화의 동기는 충분했었어요.
저는 하지현 교수님의 <아무튼, 명언>에서 읽은 "어려운 건 쉽게, 쉬운 건 깊게, 깊은 것은 재미있게"를 제 커뮤니케이션의 원칙으로 삼아 소통(특히 쓰기와 말하기 스킬)을 개선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캐너먼 교수의 이 연구 내용이 제가 원칙으로 삼은 방향이 옳다는 과학적 근거 + 잘하고 있다는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래서 오늘은 지금도 꾸준히 제가 노력하는 것들을 공유해 보려고 하는데요.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고 우스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저와 비슷한 다짐이나 변화의 방향이 있는 분들께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
첫번째 노력은, "잘 들리게" 말하고, "잘 읽히게" 쓰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죠. 잘 읽혀야 믿고, 잘 들려야 이해한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둡니다. 글을 쓸 때는 글자의 색상, 배치, 폰트, 크기에 신경을 쓰고, 말할 때는 천천히, 또렷하게 발음해 전달하려 노력합니다. 익숙한 표현으로 라임을 맞춰 전달하는 것도 리듬감을 각인시켜 더 잘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서죠.
두번째 노력은, 가급적 "짧게" 쓰고 말하려 합니다.
이건 여전히 제가 참 못하는 부분인데요;; 긴 내용은 그 자체로 어려워 보입니다. 듣다가 혹은 읽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물어볼 테니, 그때 더 설명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충동을 참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많은 양의 정보를 동시에 병렬로 처리할 수 없거든요. 메시지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비유나 예시를 들고, 명언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전문용어나 약어도 메시지를 짧게 만드는 데 유용하긴 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에겐 벽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세번째 노력은, 말과 글에 "라임을 맞추려" 노력합니다.
제가 래퍼는 아니지만, 전에 GMAT 공부할 때 배운 영어의 병렬구조를 떠올려, 한국어를 쓸 때도 여러 문장을 나열할 때는 품사의 구성이나 문장의 길이와 구조까지 맞춰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딱 맞아떨어질 땐 묘한 쾌감이 있달까요? 타이틀을 지을 때도 노랫말이나 책제목 같은 catchy 한 표현으로 쓰려고 하고요. (아직 못 이룬 작사가의 꿈 때문인지, 종종 더 집착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
마지막으로는, 이 세 가지가 다 갖춰진 다음 "재미 한 스푼을 추가"하는 겁니다.
예전에는 이 "재미"라는 녀석 때문에 앞의 세 단계를 희생한 적도 많았어요. 개그 욕심이 조금 많이 과했달까요? 그때는 결국 사람들 기억에 남는 건 재미있는 것들 뿐이라고 생각했더랬어요. 하지만 그 "재미"가 명확한 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우선순위를 뒤로 조정했지요. (이제 저도 조금은 철이 들었나 봅니다. 하지만 개그의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한...것 같아요 ;; )
AI 시대에 퇴화할 것으로 우려되는 인간의 대표적 능력이 바로 쓰기와 읽기 스킬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결국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전체가 점점 더 저하될 거라 생각합니다. 내비게이션 없이 길을 못 찾고, 핸드폰 없이 전화번호를 기억 못하는 저 처럼요 ;; 사람과의 소통의 필요성 혹은 의지가 줄어든다는 느낌은 저만 받나요?
어려운 내용은 쉽게, 쉬운 내용은 깊이 있게, 깊은 내용은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사실 쉽지 않지만 (아니 무척 어려운 영역이지만)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훨씬 더 중요해질 거라는 생각입니다. 하물며, AI에게 일을 지시하는 프롬프팅(Prompting) 조차도, 더 잘 들리게 말하고, 더 잘 읽히게 쓸 수 있어야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잖아요.
앞으로 인간에게 더 희소해지는 스킬이라면, 사회과학의 대표적 법칙인 수요/공급 곡선이 "희소하지만 값진" 말하기/쓰기 스킬의 가격과 가치를 더 높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더 오래 살아갈 세상에서, 더 큰 생애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말하기 + 쓰기 업스킬링(upskilling)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