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더니 1주일 이상 쉰 적은 신혼여행과 코로나19 걸렸을 때뿐이었다. 결혼을 하거나 전염병 정도는 걸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무늬만 대학생이었던 시절에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는데,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에 대한 벌이었을까. 25살, 직장생활을 시작하니 이러나저러나 하루 대부분 시간과 에너지는 직장에 매여있게 되었다. 입에 풀칠할 돈을 얻는 대신 내가 가진 모든 자산을 투입했다. 물리적 시간보다도 정신적으로 늘 매여있다 보니 일하지 않는 시간조차 마음의 편안함은 없었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일요일 오후부터 가슴이 답답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늘 답답했으니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씻고 출근하는 순간부터 일을 마치고 돌아와 종일 신었던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내 하루치 에너지는 끝나버렸다. 심지어 주말에 쓸 에너지까지 끌어다 쓰는 바람에 주말 중 하루는 침대와 한 몸이었다. 거기에는 나를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 속 감정 노동을 한다거나 하기 싫은 일을 매일같이 하면서 느끼는 일상 속 권태로움을 견디는 에너지,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도 애써 넘겨야 하는 에너지까지 모두 포함되어있다. 게다가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이 더해져 내 하루 에너지는 쉽게 고갈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 어떤 운동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 등 직장인으로서의 내가 아닌 온전한 나로서 보낼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마음과 몸을 돌보는 일, 불필요한 것을 하지 않는 일, 퇴근 후에는 직장 전원 버튼을 꺼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 세계 속에서 숨을 참아가며 헤엄을 치고 있을 땐 그걸 몰랐다. 헤엄만 잘 치면 될 줄 알았지,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헤엄쳐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열심히 헤엄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뾰족한 눈과 삐죽한 입으로 쳐다봤다.
어느 순간부터 물 밖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깥세상은 너무 즐거워 보였고, 그 세계의 내 또래들은 자기 분야에서 본인의 역량을 키워나가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면서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본인의 행복, 건강, 성장을 위해 퇴사와 이직을 감수하는 용기가 멋있어 보였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데, 나는 여기 계속 머물러도 되는 걸까? 행복하지 않은데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너무나 이상적인 모습을 기대한 잘못으로 그 마음을 내려놓아도 내려놓아도 너무도 다른데. 너무 실망스러운데.
정신없이 헤엄만 치던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일’과 관련하여 그 어떤 의무도 없는 시간을 취할 수 있었다. 온전히 내 자유의지대로 ‘내 취향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고 싶은 곳만 가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면서 말이다. 내가 구축해놓은 세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직업과 나이가 달라도 나와 묘하게 결이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세계 사람들을 만나니 그 만남 속 어떤 화학 작용으로 인하여 내 세계가 넓어졌다. 물 밖을 경험한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도 그 전의 나와는 다를 것이다. 왠지 입꼬리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