걘 아니야
날씨가 좋은 날 동네 산책을 하고 있었다. 밤이면 음산한 이 빌라촌도, 해가 좋은 낮엔 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건물마다 각각 개성이 있고 낮은 층고 덕분에 하늘도 훤히 잘 보인다. 분위기 좋은 동네 맛집이나 디저트 카페도 은근히 많다.
하지만 도통 고상함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내게는 생경한 장소들이고, 사실 관심도 없어 주변에 그런 가게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산다. 그런 내가 흘려 쓴 필기체 때문에 이름도 알 수 없는 디저트 가게 앞에 멈춰 선 이유를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진열장 너머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동그란 설탕 덩어리들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쁘다. 비싸다.
내 손바닥 만한, 아껴 먹어도 세 입이면 끝날 것 같은 마카롱 하나가 담배 한 갑 가격이라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비싼걸 왜 먹나 싶은 순간 문득 너가 떠올랐다. 자기 얼굴만한 마카롱을 배어 물며 맛있다고 웃을 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씨, 좋아하는거 맞네”
돌이켜보면 징조는 많았다. 모임 자리에서 자꾸만 너에게로 향하는 시선. 애써 외면해도 결국 너를 찾는 눈동자.
너에게 쓰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가격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얼마나 기뻐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나눠서 계산하자며 식사비의 절반을 보낼때는 왜 그렇게 서운하던지.
“뭐해” 라는 메시지 하나 받으면 세 시간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네 메시지가 담긴 핸드폰이 보물함 같았다. 하루종일 네 답장만 기다리는 내 마음을 너는 알까.
모르겠지.
너네 맨날 붙어 다니는데 대체 언제 사귀냐는 질문에 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는 그저 친구 사이라고 말했다. 지구에 우리만 남으면 인류는 그날로 멸종되는 거라며, 나와는 절대 아밀라아제를 섞을 일이 없다고 말하던 너. 사람들은 폭소했고, 나는 인류애가 없냐는 농담으로 괜히 씁쓸한 감정을 숨겼다.
모르겠지.
그러니까 술이나 한잔 하자는 너의 전화에 친구와 동네에서 츄리닝 차림으로 놀다 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아끼는 옷을 입고 어색하게 머리에 왁스까지 바르고 나간 날 너는 예고도 없이 지금은 헤어진 너의 전남자친구를 소개해 줬겠지. 말씀 많이 들었다고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하는 그에게 내 친구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했던 내 비참한 심정을 너는 알까.
결국 샀다. 너가 뭘 좋아할지 고민하면서. 오레오는 너무 달다고 했고,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고, 우울하면 단 것 보다 쓴게 당긴다며 말차 라떼를 좋아한다고 했었던 네 말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말차 맛 다섯 개, 딸기 세 개, 크림뷔릴레 두 개를 주문했다. 여자친구가 참 좋아하겠다고 세심한 남자친구 둬서 좋겠다는 사장의 칭찬에 들떠 별안간 타르트도 종류별로 하나씩 달라고 했다. 결국 만 원짜리 순대 국밥에도 손을 덜덜 떠는 내가 저 설탕 덩어리들에 오 만원을 지불했다.
하얀 비닐 봉지를 앞 뒤로 흔들며 너와 만날 핑계와 이걸 건네며 할 말을 떠올렸다. 오다 주웠다는 좀 아닌가.
그날 밤 전화가 왔다. 들뜬 목소리로 너는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번엔 또 누군데"
“말했잖아. 저번에 술집에서 만났다던 그 연하...”
“헌팅술집?”
“어. 솔직히 나는 연애까지는 생각 안 했거든? 근데...”
“야 너 애정결핍있냐?”
“뭐?”
“아니 맨날 이 남자 저 남자 갈아치워가면서 뭐하는 거야. 진짜 한심하다. 정신차려 너 곧 서른이야.”
“... 뭐라고?”
“니 연애사 같은 거 관심 없어. 그딴 소리 할거면 전화하지마"
나는 늘 네 옆에서 서성거렸다. 나쁜 남자를 만나 울고불고할 땐 밤새워 네 얘기 들어줬고, 그와 헤어질 무렵이면 들뜬 마음으로 환승역에서 너를 기다렸다. 그러나 너는 정차하지 않았다. 네 마음은 급행열차인가 보다. 내게 너는 그저 지나치는 정거장인가 보다.
"이 역은 그녀가 정차하지 않는 역입니다.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향하고 있으니 너는 그저 다정한 남사친 코스프레를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날 밤 씁쓸한 기분으로 담배 피우고 있는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받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손이 먼저 움직였다. 너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연애 상담을 한다.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놈 욕을 하며 네 편을 들고 있다.
내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면 너를 좋아하는 감정 따위 당장 구겨서 버려버리고 싶다. 너 안좋아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지금도 네 목소리 들어서 좋다고 실실 웃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