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나의 우울에게

디어 마이 블루

by 명건

펄펄 끓는 물 위에 라면 스프를 부었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훈기를 한참 바라보다 별안간 하이라이터의 전원을 꺼버렸다. 끓는 물을 싱크대에 붓고 면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입맛이 없다. 어제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은 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24시간 넘게 공복 상태를 유지중인 셈이다. 하루를 넘긴 공복. 누가 보면 간헐적 단식중이라 생각하겠지만,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배가 고프지 않을 뿐이다.


침대에 몸을 눕힌다. 목구멍 언저리에 뜨거운 것이 걸린 듯 답답하다. 온 몸은 바싹 말라붙은 종잇장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지쳤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더 지친 걸까.


내 기분과 상관없이 시간은 무심하게 흐른다. 가끔은 시간이라는 마차에 끌려가는 개가 된 기분이다. 나도 처음에는 열심히 발버둥 쳤다. 뒤쳐지지 않으려고. 욕심껏 살아보려고. 그런데 시퍼런 무언가 계속 내 꼬리를 잡는다. 그러면 나는 넘어져 시간에 질질 끌려 갔다. 파란 정체가 뭔지 몰라 늘 답답했는데, 어느 날 의사가 힌트를 줬다.


우울증


“검사 결과를 보면 공황장애, 신체화 장애, 우울증 진단 내릴 수 있을 것 같구요...”


신체화장애는 생소해서 특별하고, 공황 장애는 유명인들도 많이 겪는 질환이니까 힙하다. 그런데 우울증은 영 내키지 않았다. 멋있지도 않고 그저 음침해 보이기만 했다. 의사에게 반문했다.


“근데 저 매일 우울하지는 않아요. 자살하겠다 결심하지도 않았어요. 가끔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는 정도?”


의사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매일 우울했으면 이미 죽었겠죠.”



의사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불균형과 특정 뇌 영역의 기능 저하 때문이니 자책하지 마세요” 라고 했다.


아빠는

“내가 너를 잘못 키워서 그렇다.” 고 소리를 질렀다.


친구는

“멘탈이 약해서 그래.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해. 약 그거 뭐하러 먹어 먹지마.” 라고 했다.


엄마는 울었다.



기계가 되고 싶다. 나무가 되고 싶다. 바위가 되고 싶다. 생각과 감정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남청색 하늘 아래 어둑해지는 방 안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개탄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운건 담배였다. 우울증이 식욕과 수면욕 심지어 성욕도 잠재우는데 흡연욕 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빌라 건너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혹시 아이들에게 담배 연기가 닿을까 싶어 멀찍이 주차장 구석에 쭈구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이미 해는 졌고, 어둠이 밀려왔다. 지치지도 않는지 아이들의 꺄르르 웃음 소리는 도통 사그러들지 않았다. 한때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근심 걱정 없이 웃는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마지막으로 호탕하게 웃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이들아 너네는 밝고 씩씩하게 자라서 아저씨 같이 불행한 어른이 되면 안된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눈 앞에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사랑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듯 홍조 띤 얼굴로 누가 볼까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커플, 등에 업혀 잠이 든 아이가 깰까 조심조심 발걸음 하는 아저씨, 지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할아버지.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아주머니.


사랑 중인 이들의 화사한 표정을 보면 마음 한 켠이 묵직하다. 혼자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닿는다. 그러다 고독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묘한 위안을 얻는다. 본능적으로 쓸쓸한 사람은 쓸쓸한 사람을 알아본다.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그도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서로의 외로움을 눈치채고 공감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얻는다.


밖으로 나온 김에 좀 걸었다. 걸으면 마음이 좀 느슨해진다. 일정한 속도로 걷는 발걸음이,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리는 팔이, 기분좋게 피부를 간지럽히는 바람이, 적당히 빨리 뛰는 심장이 마음 속의 돌덩이를 깎아낸다.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미뤄둔 허기가 느껴졌다. 골목 어귀에 있는 자주 가던 순대국밥 가게에 들어갔다. 손님이 많이 없고 아주머니는 무심해 혼밥하기 좋은 식당이다. 아주머니는 내가 들어와도 별 관심도 없이 티브이로 트로트 방송을 보고 있다.


“순대 국밥 하나랑 소주 하나 주세요.”

“술은 가져다 드셔.”


원래 술이 약한데다 빈 속에 마시니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술기운이 훅 올라온다. 세 잔을 마시니 얼굴은 시뻘개졌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다. 속은 울렁거리고 세상이 비틀댔다. 그러다 어지러워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옆에서 기다란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식당 주인이 국밥을 테이블에 내려두고 가만히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사는게 영 힘들어?”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다. 울컥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괜히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단골 고객을 잃은 건 다음 행동 때문이다. 그녀는 가만히 내 등에 손을 얹었다. 그 다정함이 마음 속 시퍼렇게 곪았던 우울함을 터트렸다. 참았던 서러움이 흘러내렸다.


시간의 마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다정은 때로 치명적이다. 훅 들어온 다정함에 나는 무너졌고, 완전히 무너지고 나서야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오랜만에 꿈 없는 단잠을 잤다.


그래도 이제 그 식당은 못 간다. 아 혼밥 어디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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