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결혼했다. 남편은 이른 나이에 시작한 사업이 실패하여 새로운 탈출구를 찾고자 결혼과 함께 타향으로 떠났다. 나는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힘든 길을 오르고 고통을 감내하며 독박육아를 시작했다. 사랑이 밥먹여준 다고 철석같이 믿는 순수가 있어 셋방살이를 해도 전혀 거칠 것이 없었다. 몸은 멀리 있어도 언제나 남편을 그리워하며 육아하고 일하는 일상이 불행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남편은 직장 생활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20대의 내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한 달에 한번 만나는 남편을 볼 때마다 마음은 애틋했다. 혼자 멀리서 고생은 하지 않는지 마음만 쓰는 것이 전부였다. 독박육아로 힘들었지만 남편의 사업이 잘되기만을 기원하며 30대를 잘 통과해 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내 나이 마흔이 되는 해였다.
우여곡절 끝에 재기한 남편의 일이 잘못되었고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부부로서의 배신은 지탱하고 있던 삶을 송두리째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부부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일까? 믿고 싶지 않은 그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가슴을 치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울다 지쳐 쓰러졌을 때 직장 동료가 수액을 맞춰주기도 했다. 삶의 고비 중에서 육체적 경제적으로 힘든 것보다 훨씬 힘든 고비였다.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남녀가 생리적으로 다르다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건 이해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처절하게 아팠지만 20대와 30대를 견뎌온 힘으로 또 한 번의 고비를 넘어가 보고자 애써보았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충격을 그대로 흡수했는지 동전만 한 원형 탈모가 세 군데나 생기고 체중도 38킬로까지 빠져 불면증까지 겹쳤다. 행복뒤에 숨은 불행이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어서 직장 근처의 정신과를 찾아갔다. 약해지는 육체와 탈모 그리고 불면증 증상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갔다.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약을 먹었더니 세상이 도는 건지 내가 도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도 38킬로까지 빠진 몸무게가 그 약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으로 불면증을 없애지 못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탈모증상도 좋아질지 의문이 생겼다. 의사와 이야기하면 떫은 감을 먹은 느낌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인지한 나는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망으로 몸부림을 치며 우울의 깊은 나락으로 뼈져있을 때 직장 동료가 다니는 요가가 보였다.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탈출구를 찾던 중에 요가를 접하게 된 것이다. 무작정 요가원에 등록했다. 요가와 명상이라는 이미지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퇴근 후 찾아가는 요가원은 내게 마음의 안정을 주고 깊은 명상에 들게 하는 묘약이었다.
요가를 하는 한 시간은 모든 잡념을 완전하게 지워주는 지우개와 같았다. 마음의 요동을 잠재우는 한 시간이 생겼다. 하루 중에서 요가하는 한 시간은 마음의 쉼터였다.
힘든 생각을 지울 수 있는 한두 시간이 지속적으로 필요했다. 호흡과 함께 뻣뻣한 몸을 움직이며 나 자신에게 몰입해 나갔다. 요가 시간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으로 번다한 생각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워나갔다. 요가하는 시간만큼은 혼란스러워하는 정신을 고요한 세상으로 안내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흔들리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유연하게 흔들리며 부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숨통을 트이게 하는 요가 시간이 내가 숨을 쉬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머리는 차갑게 식히고 가슴의 답답함은 뚫고 마음을 아사나에 집중했다. 요가는 정신과 약보다 효과가 있었고 마음을 다스리는 치료제이며 항생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