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최승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우스워진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워지는 일일 테다.
"나"는 오랜만에 "그대 영혼의 살림집"을 찾는다. 육체의 살림집이 아닌 영혼의 살림집. 아마 오래 전 그 살림집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의 따스함과 메마르지 않은, 아마 눈물을 간직했을 그 집을 "나"는 사랑했을 터이다.
한동안 찾지 않은 그 집, 멀리서나마 소식을 들었을지 모를 그 집. "나"는 비굴하게도 다시 그 집을 찾아간다. "그대 영혼"은 그 때처럼 굳건합니까. 비에도 젖지 않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름답습니까. "내"가 사랑한 그대로입니까.
동시에 "나"는 어느 정도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대 영혼의 살림집"이 가뭄날처럼 마르고 갈라져 풀 한 포기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아궁이에는 삭정이 하나 없을 수도 있다고. 1연의 "나"는 과거와 현재를 줄다리기하며 조심스럽게 "그대 영혼의 살림집"으로 다가간다.
2연에 이르러 "나"는 "그대 영혼의 살림집" 문간에 다다른다. 물기야 들어가야 알지라도, 끓는 아궁이와 연기의 훈훈함은 문 밖에서도 충분히 느끼랴마는, 안타깝게도 그런 것들은 하나 없다. 연기 한 줄 피어오르지 않는 집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쉽습니다. 아름다운 그대도 어쩔 수 없게 되었군요. 과거에 손을 흔들고 돌아갈까? 겨우 저런 것을 사랑했었다니 하며, 그 땐 눈이 삐었다고 위로하며 맺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자기위로와 합리화를 통해 "그대"보다 한 단계 높이 위로 올라가 볼까?
사랑이란 무얼까. 보잘것없어진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섰어도 "나의 사랑"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이 되어 버리는 것일까. 문 너머의 "그대"가 "영혼의 살림집"을 돌볼 여력이 없지 않았을까 하고 염려하는 것일까. 물기도 온기도 사라진 집의 문간을 "조심히 두드"릴 수밖에 없는 마음, 여전히 "나의" 영혼에 그대를 향한 물기와 훈기가 남아 있음을 다시 확인하고야 마는 것일까.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이라도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다지도 추레하고 보잘것없지만, 혹시나, 괜찮으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