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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란 Nov 14. 2024

주기도문 다시 쓰기

니카노르 파라, <우리 아버지>


마치 속세의 보통 사람과 같이
인상을 찌푸리고
온갖 종류의 문제를 머금은 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들을 더 생각하지 마소서.

일들을 잘 해결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드는 것을 무너뜨리면서
악마가 당신을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을 비웃지만
우리는 당신을 동정합니다.
그 사악한 미소를 걱정하지 마소서.

불손한 천사에 둘러싸여 계시는
우리 아버지
정말 우리들 때문에 더 이상 고통받지 마소서.
신들이 완전무결하지 않고
우리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잊지 마소서.

니카노르 파라,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주기도문을 뒤집은 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전능함에 기대어 나약한 인간을 구원해달라 애원하는 주기도문을 다시-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것이 낯설게 하기, 시의 기본에 충실한 것이지 않을까.


 "마치 속세의 보통 사람과 같이/인상을 찌푸리고/온갖 종류의 문제를 머금은" 하나님. 나약한 하나님, 얼굴이 있으신 하나님. 근심에 찬 "인상"을 지닌 하나님. 인간이 되신 하나님. 감히 자신의 형상을 볼 수 없다고 단언하던 기독교의 하나님 아버지는 간데없다. 그렇다면 사려깊은 우리들은 아버지를 배려해드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도 우리처럼 힘드시니까. 우리는 우리가 힘든 줄을 알고 있으니까. 아픔을 안다는 건 그런 거니까.


 세상의 악과 부조리와 부도덕과 슬픔과 전쟁과 다툼과 번뇌와 죽음은 악마의 짓이고 그것을 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무능함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이 애를 쓰는 것을 알고 있다. 무능함으로 인해 수치스러운 감각은 우리의 것이었으나-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고개를 수그리는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해 주었던 것처럼.


 그러므로 인간인 우리와, 인간의 아버지, 인간-신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 생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다. 불완전한 아버지께서 지으셨으므로, 모자람은 마땅한 것이므로. 우리 또한 그러하므로, 우리는 그 모자람을 서로 견디므로. 신이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우리가 용서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용서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에. 우리의 고통이 온전히 우리의 탓이 아님을 안다면 그럭저럭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롭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함과 같이, 에 힘을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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