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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숙 Jan 20. 2024

겨울 숲 고운 별 하나

 

 

지난밤부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기온이 내려갔으면 눈이 되어 내렸을 거란 생각이 든다. 창문 너머 황량한 겨울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려니, 이해인 수녀님의 ‘겨울 길을 간다’라는 시가 생각난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 질 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지금 나는 겨울 숲길을 혼자 걸어가고 있다. 

2023년 1월 3일에 위암 판정을 받고 상당 부분 위절제술을 했다. 어제는 정기검진차 여러 가지 검진을 하고 돌아왔다. 별일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아침 일찍 예약된 외과에 접수하고 피검사를 시작으로 비수면 내시경까지 용감하게 마쳤다. CT 촬영 때는 조영제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고 온몸에 약 기운이 퍼져 뜨거워졌다. 동행해 준 효녀 딸이 고맙기 그지없다.

 특별한 이상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안심했다. 식이조절 잘해서 몸무게를 늘리는 과제만 충실히 하면 된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피곤이 몰려와 한참을 잤다. 씩씩하게 별일 없을 거라는 맘으로 병원을 방문했지만 나의 무의식은 상당히 긴장했다는 증거다.  


    

가끔 휴대폰에 저장된 1년 전 사진을 꺼내 본다. 환자복을 입은 내 모습과 수술 후 처음 먹었던 음식 사진이 보인다. 하얀 미음에 아주 잘게 다진 반찬, 국물뿐인 국이 전부다. 그때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이었다. 이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음만 며칠을 준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이후 죽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 씹히는구나!’ 속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무언가를 씹어서 먹는다는 것이 참 행복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이유식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특별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 다 먹을 수 있는 지금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너무 반성하는 것도 아닌듯하다. 이따금 사진을 보면서 그때를 떠올려보는 것도 나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참 힘든 겨울을 지나면서 우리 몸은 정직하다는 걸 알았다. 내 몸은 늘 좋은 음식과 적절한 운동을 요구한다. 먹는 양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먹는 즐거움은 반감되었다. 매사에 기운이 달려 누워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추운 날이지만 조금씩 움직이며 기운을 내야만 했다.

 한 달 뒤부터 사용하지 않던 실내 자전거가 눈에 들어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끊었던 수영장도 다시 나갔다. 누가 나를 위해 먹을 것을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손으로 직접 음식을 해 먹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했다. 

2년 전 위절제술을 한 남편을 위해 지금도 매일 새벽부터 음식을 준비하는 게 일상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부러웠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움직인 것이 나에게 커다란 도움이었음을 지금은 안다.   

   

어두운 겨울 숲길을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걸어가는 이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힘껏 보낸다. 누구나 어두운 숲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래도 고운 별 하나를 품고서 걸어간다면 차디찬 그 길에 희망 같은 온기가 동행할 것이다. 


빗방울이 조금씩 가늘어진다. 저 비가 그치면 따듯한 햇살이 골고루 세상을 어루만지고 어디선가 향긋한 봄내음이 피어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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