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를 피하기 위해 스토커가 된 여자
극의 막은 희극일 것이다.
생각에 잠기기만 하면
불행하다 느끼는 불쌍한 인생.
그게 내 삶이랬다.
엉망진창이 된 내 모습을 보며
그것을 더러 예쁘다고 하는 당신을 보면서
"봐, 사실 당신도 마찬가지 엉망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요.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러다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저구석까지 몰아세워져서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지옥 같은 패턴을 끊어내기 위해
우선 안정제를 씹어 삼키고,
어떤 생각이라도 억지로 억지로 꺼내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쯤 알잖아요.
/
인간은 행복해야만 한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웃어야만 한다.
울적한 마음을 떨치고 덜어내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이전보다 더 우울해야 한다.
이전의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게 무슨 모순이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전의 우울이 사실은 지금보다 나은 상황이었더라고.
지금 당장 내가 느끼는 우울의 크기가
이전보다 크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다 지나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다 지나갈 것이다.
우울하고 지옥 같았던 하루도 결국 한때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전보다 지금 더 우울하지만,
이다음에 더 우울해질 상황이 놓여질 것이기 때문에
나는 지금 우울하기보다, 어쩌면
행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스토킹범죄의 피해자다.
데이트폭력(교제폭력)의 피해자다.
사건을 고발한 당사자이자, 여전히 고통스러운
상처받은 치유자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본문에 적힌 내용이 대체
글쓴이가 무슨 의도로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일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비록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면 한다.
내 글을 읽는 독자 당신은 공감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부디 나와 같은
상처를 받은 ○○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
나는
스토커를 피하기 위해 스토커가 되어야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나는
스토커를 피하기 위해서 스토커가 되어야만 했다.
스토커가 내 뒤를 쫓고 있지는 않을까?
아직도 내 뒷조사를 하고 있지 않을까?
내 사진을, 내 동영상을 sns에 올리며 나를 수배하며
여전히 찾아다니진 않을까?
그를 피해 도망친 다른 지역으로까지 쫓아와
내 이름을 또다시 부르지는 않을까?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설 때마다
불이 깜빡깜빡 켜졌다 꺼지는 가로등은
잠시 열두 개의 눈동자를 보여준다.
그의 눈과 빼어 닮아있다.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금방 도망이라도 치라는 듯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내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숨은 가팔라져만 가고,
손은 작은 가방에 쑤셔 넣어
급하게 안정제를 찾는다.
물 없이 안정제를 씹어 삼킨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열두 개의 눈동자는 나를 쫓아오다
어딘가로 도망이라도 친 것인지
그 뒤로 보이지 않는다.
식은땀을 겨우 닦아내며
허탈한 마음에 포개어 앉아 통곡한다.
내 원죄에 대한 속죄가 이러한 고통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며.
눈물을 훔치며 하늘에 외쳐보지만
선선한 바람이 내 등을 떠민다.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가라고.
들어가도 괜찮다고 말이다.
스토커를 피하기 위해 스토커가 됐다.
그의 sns와 그의 위치와 가장 최근까지의 행적
내가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최대한으로 모으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오늘은 그가 찾아오지 않겠구나.
오늘은 나를 괴롭히지 않겠구나.
그러고 나서 집 밖을 나서서 외출을 하면
한 시간조차 되지 않아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공황이 나를 찾아왔다.
그와 마주칠 것 같다.
금방이라도 그와 마주칠 것 같다.
거리에 다니는 이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나를 더러 삿대질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와 비슷한 체구의 남성이 보일 때면,
혹은 비슷한 목소리가 들릴 때면, 그때는,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안정제를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굴 만나더라도
심장이 금방 놀라버려서
나는 또다시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 끝이다.
[권선징악]
: 착한 것을 권(권선)하고 악한 것을 징벌(징악)한다.
나는 당신을 벌하기 위해 스토커가 됐다.
나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아니다.
그저 이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고 있는,
여느 때와 똑같은 혐오스러운 일생의 히로인(heroine)
아프고 쓰라린 내용을 담은
극의 막은 희극일 것이다.
그때부턴 나는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도,
아픈 마음을 꺼내다가
치료해 주고 토닥여줄 수도 있겠지.
그때까지 부디, 모두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