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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 Oct 20. 2024

우리의 바다는 앞으로 푸를 테니까

더이상 미안해하지 말기로 하자는 약속

한낮에 보는 바다는

기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마음이 차분할 때는 참 푸르다 느끼다가도,

마음이 요동칠 때는 바다의 깊이가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어둡게 보이기도 한다.


난 그런 바다에 빠졌다.

마음이 요동쳐서 어둠에 몸을 던진 듯 느껴졌다.


내 발부터 시작해서 다리까지 물에 젖었고,

내 몸에 물이 젖기 시작하고 목까지 닿았을 때

이제 내가 헤엄쳐서 나올 수 없을 때까지 왔다 생각했다.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멀리 걸어갔다.

바다가 너무 어둡게 보인 탓이었을까

그날의 파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몸을 던졌다.


이대로 가다간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되겠지

바닷물이 입으로 튀기 시작하고,

내 마른 입술이 젖기 시작했을 때


중요하지 않았던 파도가

안간힘으로 나를 밀쳐냈다.


네가 왜 이 시간에, 이 깊은 바다로 들어왔느냐고

다시 모래사장으로 돌아가라며 열심히 밀쳐냈다.


그날 그렇게 죽었더라면 나는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죽었더라면,

그날 그렇게 죽어버렸더라면,


결국 또 파도가 밀쳐내 살았다.

그 찰나의 순간을 되새겨보니

그날은 내 기일이 될 수 없었다.


파도의 힘은 내가 희망한 죽음보다 힘이 셌다.

그렇게 죽어버렸더라면 내 죽음은

나에게 죽음은 곧 구원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 연고도 없이 찾아가 정착한 장소에서 만난 당신만큼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면 한다.


강박증이 있었다.


앞으로 나와 가까이 지내게 될 사람이라던가,

좋은 마음. 어쩌면 사랑이 될지

모르는 감정을 품을지 모르는 사람이라던가,


뭐가 되었든, 내 측근이 될 사람에게

나에 대해서 먼지 한 톨 빼지 않고 솔직해져야 한다.


그래서 내 치부가 되는 것부터 고백했다.

나에게는 이런 사정이 있었고, 이런 상처가 있으며

내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들을 쉴 새 없이 내뱉었다.

/

그렇게 하면 마음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게 맞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느 날에 갑자기 나에게 실망이라도 할까 봐.

누군가 실망할 만한 삶을 살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때 그렇게까지 투명해질 필요가 없었는데,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면서


아무 연고도 없이 찾아와 정착한 이곳에서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과

울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지독한 향수병 마저 담대히 견뎌내고서

사람들을 사귀었다.


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강박이었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

하늘에게 물었다.


어째서 괴로운 날들은

가만히 멍 때리고 있던 중에 수면 위로 떠올라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하면서,

잠시라도 행복을 느꼈던 나날들은

내 지난 기억들을 쥐어짜야지만 생각이 나느냐고.


가만히 멍 때리고 있다가도

이렇게 눈물이 차오르는데

눈물이 차오를 만큼 행복한 기억은

왜 내가 찾아 헤매야 하느냐고.


나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사과를 받고 있다.

줄곧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사과를 받고 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한없이 고마워해도 좋으니

미안해하지는 말라는 말을

내가 용기를 내며 이야기를 하는데도


지난 일에 대해 미안하다며 사과를 받고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죽음은 구원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더라면,

당신들에게 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눈물 젖은 사과를 받았을 테고

내 대답은 항상 같았을 테지만, 당신들은 듣지 못했을 테니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 그때 나를 외면했느냐고,

왜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때 들어주지 않았느냐고.


나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당신이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줬더라면

내가 주저앉아버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 텐데.


미련하게 바래본다.

새로이 만나게 될 어떤 인연은

나에 대해서 몰랐으면 한다고.


내가 어떤 상처를 갖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우리 가족은 이렇고,

내 과거는 이랬고...

하는 모든 이야기들을 몰랐으면 한다고.


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사과를 받은 나에게

평정심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치부에 대한 고백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아무리 억울해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억울했어도, 아무리 힘들었어도,


미안하다는 한 마디에 기꺼이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평정심을 갖고 있는 내가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에 울지 않을 수 있게


지난날 생긴 상처 위에 진물이 터져

상처가 낫질 않았는데

그 시기를 잘 견뎌내고 보니

위에 딱지가 앉았고,

딱지는 지나 흉터가 되어있었고,


그렇게 생긴 흉터는 이제 당신들의 몫이 아닌

내 몫이니.


내 굳은살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흔쾌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걸 보니,

고통의 시간이 끝나가는 듯하다.


난 이 고통에는 끝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눈물이 차올라도 혼자 울고,

누군가가 원망스럽고 그토록 미웠어도

이제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고통의 끝까지 다가왔다.


세상은 넓고,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은 모두 축복이며,

괴로운 순간보다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할 우리는


 결국,

아직 청춘이 아닐까.

/

그러니까,

우리 이제 미안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서로에게 어떤 감사를 하게 될지

어떤 감사한 일을 해야 될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약속하자.


그 약속만은 꼭 지키자고 약속하자.

담대히 이겨낸 내가 건넨 새끼손가락에 고리를 걸었다.


나는 덤덤해졌고, 앞으로도 덤덤할 것이고,

보이지 않아도 늘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테니까


더 이상 미안한 이야기 하지 말자고.

저 푸른 바다를 보라고, 아름답지 않냐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될 쯤이면

우리 마음이 차분해졌다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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