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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Aug 29. 2023

식스투스의 마돈나

화를 달래는 방법 -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요즘 화가 많이 나는 일이 매일매일 있었다. 피가 끓는다고 해야 하나,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소리부터 지르는 일이 많아졌다. 화를 내고 나면 기분이 하나도 좋지 않다. 한동안 멍하다가 기운이 빠진 채로 누워있는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내가"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잘못한 것도, 책임질 사람도 내가 아닌데 왜 내가 흥분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직 수행이 부족한 듯 하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도 내가 아닌 것을...늘 이 말을 다짐하는데 실천은 늘 어렵다. 내일은 화내지 말아야지.


화를 푸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음주가무를 하고, 누군가는 수다를 떨고, 누군가는 잠을 잔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화를 누군가와 나누기보다는 내 스스로 삭히는 편이 되었다. 좋지도 않은 것 나누어서 뭐하나라는 생각도 들고,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느껴서일까? 지금은 맛있는 것을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가슴 깊은 어딘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화라는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힘든 일이 있을때면 신앙에 매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때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걸 보고 누군가가 기도나 하다못해 명상이라도 해보라고 하였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면 더 화가 들끓지 않을까 했지만 기도는 일종의 "비움의 과정"이었다. 좋거나 나쁜 일체의 모든 감정을 잊고 신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자기계발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어느덧 숨이 트일만하니 간사한 인간이라 더 이상 아침기도는 안하게 되었다.


겨우 이런 일로 지옥은 안 가겠지만, 약간의 양심의 가책은 조그맣게 남아서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 한편이 뜨끔거린다. 이제는 꾸준히는 아니지만 마음의 고민이 생길 때마다 아주 짧은 기도를 집에서 드린다. 5분 남짓 될까말까한 내 마음대로 하는 기도지만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제멋대로인 나를 하늘의 그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계실까?


어쨌든 "돌아온 탕아"처럼 그 분의 끝없는 은총을 바라며 나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기도할 것이다. 일종의 "믿는 구석"이다. 힘들 때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 달까?


기도를 할 때 가끔은 그레고리안 성가나 바흐나 모짜르트의 조용하고 느린 음악을 듣기도 한다. 그 중에 꽤 "효과"가 좋은 음악을 추천하자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도 있는데 왜 슈베르트의 것이냐 하면,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바람 하나 불지 않는 호수의 물결이라면 슈베르트의 음악은 조용한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물결이 치고 흐르는 고요한 강가의 물결이라 할 수 있다. 가사 역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성모송이 아니라 월터 스콧의 서사시인 "호수의 연인" 중 주인공이 성모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성모송보다 더 간절하면서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어 더 쉽게 감정이 이입되는 것 같다.


가슴 깊이 추동하는 나의 감정을 피아노 반주와 선율에 맡겨 이리저리 흐르게 내버려 두면 어느덧 가라앉는 기분이다. 끓어오르는 화염과 같은 감정이 사라지고 어느덧 따뜻한 햇살 아래서 기다란 오솔길을 산책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신의 은총을 느끼며 모든 것이 감사하게 여겨지는 순간이다.


"아베 마리아 (Ave Maria)"는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성모 마리아님께 찾아가서 드린 인사의 첫 구절이다. 카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성모송이라고 하여 묵주기도를 할 때 사용한다. 특히 마지막 구절인 "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구절을 읊을 때면 '세상에 나 혼자는 아니다. 누군가는 끝까지 내 편을 들어주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든든한 뒷배를 가진 기분이랄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수 많은 명작들이 르네상스 시대 때 탄생하였다. 그 시대의 최고의 미인, 또는 아름다운 화가의 연인들만이 모델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림의 주제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모성과 처녀성을 동시에 내보여야 하는 이상적인 그림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보는 성모 마리아님들은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우시다. 하지만 출산 후에도 날씬한 몸매를 과감히 드러내는 여배우를 보는 것같은 불편함은 없다. 성모화를 볼 때 우리의 포커스가 결국 모델의 아름다움보다는 모델이 들고 있는 예수님과 모델의 주님의 어머니라는 신성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성모화들을 실제로 감상했지만 나는 라파엘이 그린 식스투스의 마리아를 봤던 순간을 잊지 못 한다. 르네상스 미술을 담당하셨던 교수님은 매우 엄격하셨는데, 미술관 투어 중 절대로 앉지 못 하게 했다. 하루에 두세개의 미술관을 관람하는데 절대 앉지 못 한다니 일종의 고문이었다. 다행히 점심 시간이나 틈틈히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거대한 미술관들을 며칠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음산한 드레스덴과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파스텔화를 감상한 후 교수님께서 모이라고 한 장소에 모두 모였다. 가끔 미술관의 배려를 받아 일정시간 짦게나마 그림을 따로 관람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는데, 식스투스의 마리아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림도 잊은 채 나는 아름다운 성모상이 아니라...그 아래 귀여운 천사에 시선을 뺏겼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아기 천사들은 이번에는 나를 그림의 마돈나에게 안내하였다. 짙은 녹색의 커튼이 열리고 두건을 휘날리며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 막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성 식스투스가 삼중관을 내려놓고 경외에 가득찬 눈빛으로 성모자를 바라보며 세상 즉 우리를 가리키고 있다. 그림이 원래 있었던 곳인 피아첸차의 수호성녀인 성 바르바라가 왼편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겸손하게 그녀를 맞이하고 있다. 아직 어린 아기인 예수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무구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우리의 원죄를 대신 지고 고통받으실 어린 아기 예수와 뒤의 수많은 천사들의 얼굴을 보면서 누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불같은 분노가 아니라 조용한 꾸짖음같은 이 그림 앞에서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듣는다. 어디선가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계시는 하늘의 그 분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자비로운 성모 마리아님께서 나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깊이 타오르는 화를 조용히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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