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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Aug 25. 2023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

심판-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 (Dies Irae)"

나는 운 좋은 세대다. 신분제가 있던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를 지나 동족상잔의 전쟁이 끝나고 고도 경제 성장의 끝물 쯤에 태어나 전쟁은 커녕 배고픔과 질병따윈 모르고 자랐다. 88올림픽과 엑스포 거기다 월드컵과 동계 올림픽까지 굵직굵직한 행사도 내가 기억할만큼 어느 정도 컸을 때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었으니 나름 재밌게 살았다. 물론 자잘자잘한 차별과 불의는 겪었지만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당할 만큼은 아니었다. 인생의 반절(?)쯤 왔을 때 코로나라는 역병이 돌았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가끔 조선시대 공주와 비교하여도 더 맛있는 것도 먹고, 하고 싶은도 마음대로 하고,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가고, 그래서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사는 한반도는 조용하지만 저기 멀리 어디선가는 여전히 총성이 들리고 있다. 나의 삶은 평온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언제 어디서 예고없이 날아드는 총탄을 피해 두려움을 떠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이란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 있어왔다. 사소하게는 내 가족이 먹을 고기 한점을 위하여, 그리고 뺏기지 않기 위하여, 크게는 정치수단으로 내 조국의 영광과 모시는 군주의 야망을 위하여 싸우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소심한 나로선 "아, 그거 그냥 양보하고 살면 안되나요?"라고 하지만 그네들에겐 소중한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야할 게 있겠지.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다. 


가끔 전투 다큐멘터리를 보면 과거의 전투를 재현하면서 승자의 전략이던가 왜 패자가 졌는지를 시뮬레이션화해서 보여준다. 수학 공식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항상 뜻하지 않은 행운과 비범한 지휘관의 전략이 딱딱 맞아 떨어지면서 일순간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걸 보면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운명이란 있는 것인가?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처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한다고 많은 수의 적을 소수의 군대가 물리치는 전략을 보면서 운명이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웃고 있다고 내일도 웃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의 관점에서 하늘에서 전쟁을 보면 그저 모두 한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수백, 수천, 수만의 생명들이 아스러져 간다. 뭐 지휘관이 앞으로 나아가니 참전한 이상 "에라, 모르겠다"하고 뛰어가는 거지만, 코앞에서 칼과창을 휘두르고 적을 보고 겁을 안 먹을 사람이 어디있을까? 정신없이 덩달아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르고 여기저기 찌르고 정신차려보면 살아있는 거고, 아니면 이 게임의 참관자인 신 앞에 다소곳이 불려가 일생 저지른 죄에 대해 심판 받고 있는 모두 한낱 미물의 인생이다. 살고 죽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착하게 살았다고 전쟁에서 뭔가 메리트를 받는지 안 받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적군이나 나나 그저 전투는 알 수 없는 운명의 연장선이다. 모든 것은 신이 결정한다.



1529년 오스만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략했다. 대군을 이끌고 온 오스만제국의 술탄에 대항하여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은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이들은 당시 전성기였던 슐레이만 대제를 물리친다. 동시대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는 이 승리를 기원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왕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수스 전투"에 비견하여 기념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기독교가 아니었고, 슐레이만 대제의 오스만 제국과는 달리 페르시아 제국은 침략받은 입장이었지만 넘어가자. 세계를 정복한 "가장 강한 자"라 불린 알렉산더 대왕은 당시 서방 지배자들의 정신적인 선조였고,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나 별반 다름없는 악마같은 이교도들이니 말이다.


영화 "300"처럼 굉장히 서구적인 시각에서 그려진 오류투성이인 그림은 그림만 보자면 스케일도 굉장할 뿐 아니라 세밀한 묘사가 뛰어나다. 병사 하나,하나 공을 들여 당시의 급박함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림을 가득 채운 수천명의 보병과 기병들이 페르시아군들을 블랙홀처럼 포위하며 진격하고 있다 . 하늘에서는 어디선가 신의 심판을 알리듯 붉은 석양이 비추고 있으며 신의 분노를 알리듯 바닷물은 넘실된다. 무언의 신의 결정에 의해 병사들의 생명이 아스라짐과 동시에 하늘 위의 태양이 빛나면서 페르시아의 초승달이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몰락과 함께 세계의 기득권이 그리스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또한 알트도르퍼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당시 16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종말론적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에게 기독교 세계를 침범한 이교도와의 전쟁은 성경에서 나타난 6번째 시대의 몰락의 전조이자 7번째로 시대로 향하는 심판대였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은 심판이 다가옴을 알리는 징조였다.


미사곡 레퀴엠의 부속곡인 진노의 날 "Dies Irae"는 세상의 마지막인 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의 날"에 신 앞에 선 영혼들이 자비를 청하는 곡이다. 그 중 베르디의 작품이 가장 유명한데 타악기 그리고 관악기가 북을 두드리듯이 인류의 마지막 심판의 날을 알리면 4성부의 합창과 현악기의 빠른 패시지가 그간 쌓인 인간에 죄악에 대한 신의 분노와 그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음표로 그려낸다. 이어서 피할 수 없는 죄의 심판이 떨어지고 신의 냉혹한 결정에 죄많은 인간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청한다.


알트도르퍼의 그림을 보면서 이 곡을 듣고 있으면 타악기와 북소리는 마치 전장의 병사를 격려하는 소리같기도 하고, 휘몰아치는 하늘 어디선가 들리는 신의 나팔소리같다. 이어서 들리는 합창과 현악기 소리는 이리저리 사납게 달리는 말발굽 소리에 정신없이 병사들이 내지르는 소리같이 들린다. 나 역시 전장의 한 가운데서 신의 주사위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정신없이 여기저기로 밀려다니는 느낌이 든다. 나는 사는 쪽일까? 죽는 쪽일까? 모른다. 그저 신의 가호와 자비만을 바랄 뿐이다.


가장 원곡이라 할 수 있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진노의 날"은 베르디나 모짜르트의 곡처럼 무섭지 않다. 가사는 그대로지만 아주 차분하게 신에게 기도드리는 기도곡이다. 아마 역사가 흘러가면서 인류가 쌓은 죄만큼 신이 분노하셔서 당장 불벼락이 떨어질 듯한 무서운 곡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마지막 날에 귓가에 들리는 음악이 이 "진노의 날"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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