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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Aug 27. 2023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깨뜨리다 - 류이치 사카모토 "레인"

영화를 좋아하는 부모님을 따라 어린시절부터 시내의 영화관을 자주 찾았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관람문화가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어서 미취학 아동인 나 역시 영화관에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했었다. 어린 나는 영화의 대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루해 하지 않고 열심히 영화를 보았다. 어른의 사정이라던지 복잡한 스토리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를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가끔 그 당시 내가 이해한 내용과 성인이 되어 본 내용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 덕분에 상당한 명작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다. "킹콩", "마지막 황제", "인디애나 존스", "노스트라다무스" 등등. 모든 내용이, 모든 장면이 기억 안나지만 어두컴컴한 영화관과 붉은 카페트가 깔린 좁은 복도, 쿰쿰한 냄새 그리고 몇몇 장면들은 여전히 기억난다.


"마지막 황제"는 마포 어딘가의 영화관에서 봤었다. 영화를 다보고 시멘트 계단을 내려오니 밖이 여전히 밝았다. 아마 주말에 영화를 봤나보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제 겨우 제 이름 쓰는 아이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난 지금도 회자되는 몇몇 명장면과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긴 손가락을 가진 무서운 할머니와 강시 영화에서나 보던 복장의 사내들이 나오더니 어린 꼬마가 거의 유괴되다시피 궁전으로 끌려갔는데, 거기서부터 나는 겁을 먹었다. 중국의 황실문화와, 황제인데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속박받는 푸이의 생활에 이상하다고 느꼈었다. "황제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궁에서 쫓겨나지를 않나, 나쁜 일본 놈들이랑 친하게 지내다가, 한때 백성이었던 사람들한테 사상교육을 받지를 않나, 거기에 어른의 사정이 더해지니 어린 아이가 보기엔 상당히 기괴하면서도 차가우면서도 슬픈 내용이었다. 신데렐라, 인어공주 등 공주가 나오는 동화책을 보며 인형놀이를 하던 나에게 푸이의 인생은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의 인생과 사뭇 달랐다.  


부모님과의 따뜻한 기억도 그렇지만, 영화 자체도 잘 만든 영화라서 대학생이이 된 후에도 이 영화를 몇 차례 반복해서 보았다. 그 때마다 감상 포인트도 달라서 전혀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이유는 영화음악을 담당한 사람이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걸 알게 되서였다. 영화에서는 흑막으로 나오는 일본인데, 영화음악은 일본인이라니 아이러니했다. 당시 일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는데 음악이 너무 좋았던 나는 대가가 만든 글로벌한 영화는 역시 다르구나하며, 내가 미워하는 일본의 범주에서 사카모토는 살짝 빼버리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영화를 봤었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두번째 부인인 원슈가 "I want a divorce!"를 외치며 푸이를 떠나는 장면이다. 부귀로운 생활이지만 두번째 부인의 위치가 싫은 그녀는 계속해서 황제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겉은 서양식인데, 속은 동양식인 황제에게는 어불성설이다. 벽같은 황제에게 이리저리 호소를 하던 원슈는 결국 편지들을 남기고 -아무래도 황제에게는 보내는 한 장은 이혼 청구서겠지- 호화로운 저택을 나선다. 항상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귀한 몸이었는데, 걸어 나가려니 비까지 쏟아진다. 그녀의 충실한 몸종이 우산을 받쳐주지만 그녀는 이내 우산도 거부하고 웃으며 그녀를 구속하던 모든 것들과 이별한다. 이 모든 장면에 사카모토의 "레인"이 함께 한다.


비를 막아주는 줄 알았던 우산이 알고보니 나를 구속하던 것이었고, 비를 맞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좀 맞으면 어떤가? 비가 오는 건 사실 아주 당연한 현상인데...단순하게 반복되지만 점점 음계를 높여가며 격정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레인"의 멜로디는 이혼을 원하는 원슈와 황제의 고조되는 갈등에서 시작되어 그녀가 용기를 내어 황실에서 도망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남자면서 현대 일본인이자 나름 부잣집 아들인 사카모토는 어떻게 원슈의 감정을 이렇게 잘 알 수 있었을까? 누구나 자신만의 굴레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를 지켜주던 껍데기가 알고보니 나를 구속하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우리는 누구나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익숙한 것에서 오는 안정감을 어느 누가 깨뜨리고 싶어할까? 시작은 아주 작은 한 걸음이지만 그 걸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기나긴 고뇌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피카소는 변화를 무서워하지 않는 예술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신동이었던 그는 자신의 실력에 만족하지 않고 늘 새로운 화풍을 찾아 자신의 세계를 부수면서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대중에게 한번 인정받으면 그 스타일을 고수하며 안정된 창작생활을 고수하기 마련인데, 그는 절대로 남의 평가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행보에는 예술가로서의 고집과 자신감이 한 몫했겠지만, 결국 자신의 방식이 옮았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 오는 짜릿함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유학시절 나는 피카소의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이라는 미니홈피 대문사진으로 걸어 둘 정도로 좋아했다. 그림을 처음 봤던 건 피카소에 대해 한 학기 내내 발표하고 토론하는 수업이었는데, 스쳐지나가듯 언급된 이 그림을 보고 재빨리 노트한 다음 집에 와서 찾아내었다.



쓸쓸하고 고독했던 건지 아니면 생선을 못 먹어서 바다가 고팠는지 몰라도 이 그림을 보면 속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함 내지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직 큐비즘의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피카소가 새롭게 빠져들기 시작한 신고전주의 화풍이 명확히 보이는 이 그림 속의 여인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머리를 흩날리며 서로 손을 맞잡은채 파란 바다가 보이는 해변가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 무엇이 이 여인들을 달리게 했을까?


여인들의 표정을 보면 두려움 따위는 없다. 쫓기는 것은 아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웃고 있는 표정과 번쩍 든 손을 보면 두려움이라기보다는 환희에 가깝다. 여인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마음껏 즐거워하고 있다. 옷이 내려가 가슴 따위 드러내도 상관없다. 여인들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파란 하늘과 바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고 있으면 그녀들이 가슴을 드러낸 이유는 당연히 납득이 간다. 그녀들을 구속하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해방감, 이제 그들은 솔직하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내고 느끼고 있다.

  

안락한 황실의 생활을 제발로 차버리고 비를 맞으면서도 웃었던 슈가 오버랩되는순간이다.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공산당과 문화혁명을 겪으며 한 때 지배층이었던 원슈는 공공연히 핍박받았다. 그녀는 교사나 거리 행상등 수차례 직업을 바꿔가며 생계를 유지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에서 못 벗어나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불행했던 푸이나 황후 완룽과는 달리, 그녀는 자유로웠다. 결국 이혼 당시 푸이와의 약속을 깨고 말년엔 일반 노동자와 재혼을 하여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역사의 흐름 뿐 아니라 인지상정으로 그녀가 황실이라는 안락한 새장을 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리란 건 자명하다. 스스로 두 발로 온전히 서는 경험을 한 그녀는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 세상을 깨뜨리 자는 두 번째 세상을 깨뜨리는 것도 무섭지 않은 법이니까. 자, 이제 알을 깨뜨리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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