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스갯소리로 짧아서 좋은 게 두 가지란다. 교장 선생님 훈시와 미니스커트 길이가 그것이다. 이제 나이 탓인지 미니스커트 길이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어린 날 조회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교장 선생님 말씀은 짧을수록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수십 년 전 일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여름 어느 날 방학을 하는 날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합한 전교생 앞에서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교장 선생님 말씀은 좀체 끝날 줄 몰랐다.
그날따라 여름철 뙤약볕은 온 땅을 달구듯 내리쬐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교장 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아이들은 지루하다 못하여 너도나도 고역스런 눈치를 감추지 못했다.
그날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한동안 서 있을 때다. 마침 앞줄에 선 같은 반 남자 아이 광수 뒤통수에 무엇인가가 붙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배가 볼록하리만치 통통한 이 한 마리가 소리 없이 기어가고 있었다. 팔을 뻗쳐 그것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높은 연단에 서서 근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시는 교장 선생님을 의식해야 했다. 무엇보다 우리 반 맨 앞줄에 서서 호랑이 같은 표정으로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는 담임 선생님이다. 그 기세에 반 아이들 전체는 주눅이 들어있었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조차 닦지 못했다. 손끝 한 번 움직이지 못한 채 부동자세로 서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나 역시 눈으로만 그 이 한 마리가 어디로 기어가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광수 뒤통수에 머물던 이는 어느새 방향을 바꿨다. 그리곤 땀으로 범벅된 그 아이 목덜미를 타고 헐렁한 티셔츠 속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이 무렵 여전히 교장 선생님 말씀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머잖아 그 아이 몸이 움찔 하더니 오른쪽 팔을 번쩍 든 후 자신의 등으로 가져가서 긁어대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아이 옷 속으로 돌진한(?) 이가 저지른 짓임이 분명하다. 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물기 시작하자 나타난 증상이었을 것이다.
이 한 마리 때문에 그 아이의 자세가 순간 흐트러졌다. 이런 광수를 본 담임 선생님은 득달같이 그 아이 곁에 다가와 종아릴 ‘툭’ 차며 똑바로 서 있으라고 나무랬다. 그것을 목격한 나는 보다 못해 무슨 용기에서인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곤 연단에 서 있는 교장 선생님을 향하여 목청껏 외쳤다. “ 교장 선생님, 광수가 몸을 움직인 것은 이 한 마리가 그 애 몸을 물어서입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멀뚱히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기어코 연단에서 내려왔다. 나의 이 말에 전교생들이 터뜨리는 웃음으로 학교 운동장은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학교에서 유명세를 떨치게 됐다. 선생님들은 물론 전교생이 나를 기억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해충(害蟲)인 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그런 벌레도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우리들 삶 속에서 망각돼 고전적 해충으로 자리했던 이였다. 그러나 이것이 아파트 지역 학교 아이들 사이에 번진 적이 있다. 이의 출몰 덕분에 학교 앞 문방구에선 자취를 감췄던 참빗이 불티나게 팔린 걸로 기억한다.
우리 선조들은 해충인 이에 대해서도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는 웅숭깊은 사고를 했다. 한낱 사람의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뱃속을 채우는 이였다. 하지만 이런 해충에게도 세 가지의 의로움을 갖췄다고 믿어온 게 그것이다. 어느 문헌에서 읽은 내용에 의하면 그 첫 번째 의(義)가 절의(節義)란다. 이는 언제든지 어디서든 머리를 북쪽에 두고 이는 자신의 행보를 옮긴단다. 이를 두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라고 칭송한 조상들이다. 이런 이의 절개를 두고 옛 사람들은 길을 떠날 때 나침반으로도 삼았다고 하니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즉 길을 떠나다가 방향을 잃으면 허리춤에서 이 한 마리를 잡아내서 동서남북을 가늠했단다. 둘째로선 이가 지닌 정의(情義)라고 한다. 인정머리가 없는 냉정한 사람에겐 이가 기생하지 않는다고 여겼단다. 그래 몸에 이가 없는 사람은 성품이 냉랭하다고 판단했단다. 결혼 조건이나 친목 모임을 맺을 사람으로선 소외 받기도 했다고 하니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선호한 조상들은 휴머니스트임에 분명하다.
가장 인상 깊은 이가 지닌 의를 꼽으라 한다면 은의(恩義)다. 그러고 보니 눈을 돌려보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매사 감사한 마음엔 둔감한 채 살아온 듯하여 손이 절로 가슴으로 간다. 그러나 미물의 이는 달랐다. 겨울 날 밖에서 얼어붙은 이를 주워다가 옷 속에 넣어두면 그 이는 다른 이를 선동, 옷 전체의 다른 이들을 선동해 떼 지어 나간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의 인간에게 지키는 은의야 말로 만물의 영장인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요즘 세상엔 타인이 베푼 친절이나 정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매우 희박하고 사람답게 사는 덕목마저 외면하고 사는 듯해서다. 그래 요즘 이가 지닌 삼의(三義)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