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움, 고귀함, 순결이 창조 되는 내 안이다. 이곳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는 순간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낮 동안 우짖던 청아한 새들 울음소리가 그치고 은은한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 열락(悅樂)의 신음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하늘 가득 울려 퍼진다. 머잖아 다가올 새벽의 닭소리에 힘입어 수억 마리 씨앗들이 좁은 강물을 헤치고 내 안에서 유영이 끝난다. 이 때 우주 한 축이 심히 흔들리며 그 황홀경은 인간을 무아지경으로 이끌곤 한다. 그러하기에 천하가 내 안에서 좌지우지 되며 영웅호걸도 내 속에서 잠들기 예사이다.
세상 절반을 차지하는 성스러운 여인들, 그 몸에서 나또한 수없이 입히고 벗겨지곤 하였다. 현모양처 본보기인 신사임당, 명필을 길러낸 한석봉 어머니, 유관순, 잔다르크, 나이팅게일, 대서양을 횡단 비행한 미국 아멜리아 에어 하트 ,폴란드 미완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등 여인들 몸에서도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도 때로는 수난을 면치 못할 때가 허다하다. 나를 여인들 몸에서 완력으로 벗기고 갈가리 찢으려는 늑대들의 야비한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그것이다. 그들의 잔인한 손아귀에 의하여 내 안은 심신을 유린 당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인간만이 여성을 학대한다는 점이다. 비겁한 이리나, 가축으로 타락한 개조차도 그런 짓은 안한다.’ 라고 자신의 소설 『길』에서 남성의 짐승만도 못한 처사를 적나라하게 지적 했을까.
잭 런던의 일침처럼 예나 지금이나 나를 걸친 이들이 여인이라는 이유로 고통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즈막 여인들의 아픔이 세상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그동안 견고했던 유리 천장이 다소 뚫어진 이후이다. 이 전에는 길을 지나가다가도 남자들 휘파람 소리에 묻어오는 구역질나는 육담을 여인들은 나의 넒은 품새 안에 눙쳐야 했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십 수 년 전 어떤 남정네는 어느 여인 귀의 귀 바퀴를 뚫어지라 응시하더니 급기야는 희롱하는 언사를 내비쳤다.“ 히히히, 귀만 봐도 잘 알지, 조이고, 닦고, 기름 치고, 당신 남편은 행복하겠어.”
훌러덩 벗겨진 대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 남정네는 번들거리는 탐욕의 눈빛을 여인의 귀에 내리꽂았다. 끝내는 그 눅눅하고 음습한 손가락을 놀려 여인의 귓볼을 한동안 만지작거렸던 기억도 있다. 요즘 이런 작태를 벌였다가는 성희롱으로 철창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인은 소름 돋는 그의 손길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채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시간을 인내하고 감내 해야 하였다. 안 그러면 여인이 서 있는 땅이 지각 변동을 일으켜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여인이 겪는 수난이 여기서 한정 되랴. ‘남자는 두 벌 바지를 가지면 새 아내를 생각 한다’ 는 이란의 속담 같은 상황도 감수해야 했잖은가. 날만 새면 주체할 수 없는 남정네의 욕망 덕분에 여인이 받는 고초는 외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나보다. ‘여러 아내와 결혼하는 건 인간이지만 , 많은 아이를 얻는 건 신적(神的)인 것이다.’ 라는 수메르족의 속담으로 미뤄 봐도 남정네의 성적 욕구는 늘 정당화 되고 이에 희생 당하는 것은 여인이었다.
밤새 침대에서 아내의 몸에서 나를 벗기고 아내 몸을 껴안고 뒹굴던 남편이다. 다음 날 아침 아내를 추운 이불 밖으로 내몰아 아침밥을 짓게 하고 가사 노동에 시달리도록 방관하는 게 오늘날 남편들 모습 아니던가. 또한 한창 남아 선호 사상이 잔재했던 시절엔 사내아이를 많이 출산해야 한다는 가문의 족보를 의식하여 여인 옥문은 수없이 열려 있어야 했다. 열리는 것도 모자라 헌신과 희생을 강요받았다.
아이 한 명을 출산할 때마다 여인은 서 말 피를 쏟아야 했고, 아이 한 명을 양육하느라 석 섬의 젖을 짜내어야 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던가. 하지만 여인의 공덕을 말살 시키는 억압과 잔혹한 행위는 끊임없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보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은 우리나라 여인들의 치마를 걸핏하면 들추고 벗겼다. 이름도 그럴싸한 위안부 명목으로 말이다. 이런 형국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성폭력, 성희롱, 성 추행이라는 역겹고 치명적인 행위는 순전히 가해자가 남자이다. 아직도 남자들의 짐승만도 못한 추악한 행태는 끝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호시탐탐 여성의 몸에서 내가 벗겨지기를 노리는 남정네들의 추접한 야욕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 왔을까? 모태는 여인이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원형이 여인이었다. 남성들이 뿌린 수 억 마리 씨앗 중 한 톨의 씨앗을 거두어 열 달 내내 태중에 품고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고 뼈를 깎아 그들을 이 세상에 탄생 시킨 것도 여인이다. 오죽하면 문정희의 시(詩) 『치마』 시어처럼 대리석으로 받쳐 든 신전(神殿)이 여인의 자궁 아니던가. 그것엔 신이 살고 있고 우주 삼라만상이 깃들어 있는 곳 아니던가. 여인의 몸을 거탐하는 남자들을 문정희는 평생 신전(神殿)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라고 격상 시켰다. 그러나 남성들은 주의 할 일이다. 문정희는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이 치마 속이라고 일렀잖은가. 남정네들이 모르는 게 또 있다. 여인 몸에서 소리 없이 내가 거두어질 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세계 각국의 사회 전반에 조용히 일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만 보더라도 나의 위력을 알잖는가. 이젠 나를 여인 몸에서 함부로 벗기고 찢던 야만적인 행위를 멈출 시점이다.
아우구스트 베벨이라는 사람은 여성을 최초의 노예였다고 함부로 말했지만 이는 여인의 강인함을 모르고 지껄인 헛소리였다. 이젠 치마 시대이다. 사회각계 각층에 여풍(女風)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잖은가. 어디 이뿐인가. 자본주의 체제에선 돈 줄 잡은 사람이 최고의 권력자다.
집집마다 아내가 집안 돈 줄을 잔뜩 움켜쥐고 몇 푼의 돈을 남편에게 던져주는 아내 모습에선 휘황한 아우라 마저 풍긴다. 위풍당당한 아내 아니던가. 쥐꼬리 만 한 용돈을 받아 챙기는 남정네들, 그 꼬락서니란 마치 주인이 주는 먹이를 낚아채는 강아지 꼴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나는 여성의 몸에서 좀체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부심 탓이다. 아직도 세상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나를 입고 치열한 삶과 남자 못지않은 사회적 성취로 일세를 풍미하고 있으니, 나의 너른 품새를 펄럭일 때마다 피어나는 찬란한 빛에 남자들이여! 한껏 도취할지어다. 그대들이 진정으로 한 여인을 사랑하여 열락의 밤을 만끽할 때 그 때 나는 너그러워지리. 나는 그날 밤 창가에 쏟아지는 서늘한 달빛을 가리는 은밀한 커튼이 되어 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