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임용고시 시험날이 다가왔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은 "다시는 절대 하지 못 할 1년이다."였다. 정말 그랬다. 나는 이번에 떨어진다면 그냥 복직을 하고 주말부부로 살며 다른 방안을 강구해 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생활이 아닌 1년이었다. 새로운 육아와 공부만으로 채운 기간은 나를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느끼게끔 하였다. 이미 몸은 너무 고장이 나있었다. 필수적으로 미뤄놓았던 몸조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몸조리의 중요성을 여러 번 이야기하는구나 싶었다.
유치원 임용고시는 1교시 교직논술, 2~3교시 교육과정 A, B로 이루어져 있다. 터질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시험지를 받으며 아이들 얼굴이 떠오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받으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큰일이다. 머릿속에서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글자도 눈에 읽히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시험은 망했다는 것을. 내가 무슨 말을 적고 있는지도 모른 채 1교시 시험은 '글자수만 채우자'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내려 갔다. 나도 내가 쓴 논술 중 최악의 글을 임용고시에서 쓸 줄은 몰랐다.
시험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나는 덜컥 눈물부터 쏟아질 것 같았다. '일 년 동안의 고생했던 순간들을 이렇게 하늘로 날리는구나.' 모든 도와주고 응원해 준 사람들에게 미안해졌다. 시험을 포기하고 문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가고 나면? 신랑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지? 중간에 포기했다고? 그건 자존심 상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번 교직 논술에서 깎인 점수를 2~3교시에 만회하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법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이제 겨우 3개의 시험 중 하나를 치렀고, 하나만 망쳤을 뿐이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쉬는 시간 내내 주문을 외우 듯 외쳤다. '1교시를 만회해야 한다. 1교시의 점수를 채워야 한다.' 그 주문은 아주 강력했다. 2교시 시험지를 받고도 바로 문제를 보지 않았다. '실수금지' 크게 쓴 글자 옆에 내가 실수하는 유형을 적어 내려갔다. 그 후 문제를 풀면서도 기호가 제대로 맞는지, 옳은 것은/옳지 않은 것은 등 실수로 날릴 수 있는 점수들을 교차 확인했다. 3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나는 모르는 문제는 어쩔 수 없다. 아는 문제 실수만 막자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마무리 한 1차 시험에서 가까스로 합격을 확인하였다. 컷+2점! 1.5 배수를 뽑는 임용고시에서 2차 뒤집기를 하지 않으면 떨어질 운명이었다. 2차도 1차만큼 죽을 듯이 공부했고,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하고 나오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하였다.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보다는 조금 정제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그렇게 나는 임용고시에 최종 합격을 하였다.
최종합격 이후 합격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각종 서류와 건강검진을 끝내고 약 2주간의 임용예정교사 역량강화 직무연수에 참여하였다. 엄마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져라 밤새 우는 둘째 딸 덕분에 2주 동안의 직무연수는 지역을 오가며 다니게 되었다. 출퇴근 시간만 5시간이 넘게 걸렸다. 당연히 신랑의 집에서 출퇴근하면 더욱 쉽고 빠르게 다닐 수 있었지만, 도저히 내가 편하자고 아이의 우는 모습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뭐든 다 내 손으로 해야 편안했고, 내가 포기하는 것이 편했다. 그렇게 나는 2주 동안 한 번의 지각 없이 지역을 오갔다.
직무연수가 끝나자 신규임용교사 임명장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행사였고 가족 중 1명이 대표로 단상 위에 올라가 교육감님에게 축하도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우리 가족은 당연히 첫째 아이가 대표가 되기로 하였다. 뒷바라지는 신랑이 많이 하였지만 신랑만큼 많이 해 준 것은 첫째 아이였으니까. 그렇게 3살 아이와 함께 단상에 올라가 축하를 받으며 우리 가족은 이렇게 우리는 이제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