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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Teacher Jul 10. 2023

출산 60일 차 연년생 엄마. 임용고시를 시작하다.

주말부부로 살며 육아휴직기간에 합격하라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나 다른 학교로 이직해야 할 것 같아. 이번에는 대구야. 매일 출퇴근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첫째 아이 2살, 둘째 아이 7개월 둘째 아이의 출산을 코 앞에 두고 우리 가족은 주말부부를 시작하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딱히 다른 대안이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신랑의 육아와 집안일 참여가 높았던 나로서는 잘 버텨 낼 자신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차라리 육아 휴직 중이 다행이야. 아이를 혼자 어린이집 데리고 다니며 내가 일까지 하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 하며 최대한의 긍정력을 끌어올렸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둘째는 조산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첫째 아이를 조부모님께서 가정보육 하면서 대학교 부설 국공립 어린이집 교사로 일도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만 있으라는 의사에 조언, 그게 힘들 것 같다면 입원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당장 첫째 아이와 어린이집 상황을 생각하면 그게 쉽지는 않았다. 아빠도 갑자기 집에 오지 않는데 엄마까지 입원해 있으면 불안감 높은 아이는 어찌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울음으로 버티기도 하고, 원망으로 버티기도 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나니 더 힘든 상황이 연출되었다. 젖먹이 신생아는 생각보다 예민했고, 엄마를 빼앗긴 첫째는 더 엄마에게 집착했다. 물론 아빠가 오면 삐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 아빠 품에 쏙 안겨 아빠바라기가 되어주었지만, 문제는 둘째였다. 둘째는 아빠라는 존재를 어색해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아빠를 싫어했다. 아빠가 오면 잠투정부터 시작하여 몸의 일부분이 엄마와 맞닿아 있어야 울음을 그쳤다. 무언가 불안한 듯 잠도 잘 자지 않았다. 신랑이 오는 주말이면 나는 너무 좋았는데, 가고 나면 너무 힘들었다. 아빠를 찾는 첫째부터 수면 습관이 흐트러진 둘째까지 그냥 이 상황이 막막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주말부부 4개월째. 나는 주말부부 포기 선언을 하였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내가 너무 버티기 힘들었다.  자꾸 이 힘든 시기 혼자 해야 하는 것에 입에 칼을 물고 신량을 몰아세웠다. 신랑이 야근을 하면 '나는 지금 내 커리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애 둘을 잡고 울고 있는데 너는 야근을 해?' 하며 화가 났고, 집에서 퇴근해서 들어왔다는 전화는 '나는 퇴근도 없이 24시간 풀가동인데 이제 쉴 수 있겠다. 좋겠네.' 하며 화가 났다. 뭐가 그리 심통이 났는지 모든 말이 다 고깝게 들리니 온 가족이 다 같이 지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어렵게 들어온 현 직장을 포기하고 신랑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막상 그만둬야겠다 생각하니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대학교를 다니며 취업 목표로 삼았던  어린이집이었다. 그 어린이집은 해당 학교의 학생만 취업이 가능하여 일부러 대학원도 갔다. 자비를 들여가며 생태유아교육 자격증을 따기 위해 주말도 반납하며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게 너무 재미있었고, 항상 책으로만 보던 그 공간에 내가 교사로 있다는 것, 내가 교육가 연구를 함께 한다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다.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 이제는 정말 놓아주어야 한다. 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더 낮은 대우와 처우, 그리고 급여를 받으며 일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이상의 대우와 처우, 급여를 받기란 불가능이었다. 그렇다면 길은 단 하나. 임용고시밖에 없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 내 발 밑이 낭떠러지고, 이제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다면 계단을 한 계단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출산 60일 차에 임용고시생이 되었다.


 물론 겁이 안나는 것은 아니었다. 노량진에서 3년간 가장 유명한 임용고시 강사님께 수업을 들으면서 도전하는 친구도 있었고, 결혼 직전 24시간은 모두 사용하며 임용에 매진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상황은 하루 24시간 중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무리 세어보아도 1시간 남짓이 가능할까 싶었다. 이렇게 상황에 타협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임용고시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아이들과 떨어져 공부를 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아이들이 그걸 버텨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도서관 사서에 합격한 학부모의 말이 떠올랐다.


 "출산 이후 1년이 가장 아이들과의 래포 형성에 중요한 시기라고 하지만, 저희 직업에는 그렇게 형성한 래포를 계속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결정하고 1년만 하며 독하게 공부했어요. 지금은 멀어진 아이와의 관계를 평생에 걸쳐 다시 만들 수 있으니 행복해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할 인생은 아주 기니까요. 선생님도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요!  선생님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맞다. 나는 당장 1년만 아이들과 생활을 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다. 1년 정말 아이들을 품에 안고 사랑을 주어도, 복직하면 멀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야근도 너무 많았고 아이들이 시간이 많은 방학 때 나는 세미나로 더 바빴다.


  눈앞에 그렇게 학원을 뺑뺑이 돌고 있을 아이들이 생각났다. '그래 아이들을 위해 마음먹은 일이니 아이들이 핑계가 되지는 말자!' 그 생각이 들자 당장 합치려던 주말부부도 유예기간을 두었다. 아무래도 임용을 공부하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근처에서 바로 달려와주실 친정과 시댁이 바로 여기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초수 합격을 목표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였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말이다. 물론 모유수유도 하고, 아이 이유식도 스스로 만들어 주었다. 둘째 아이를 안고 첫째와 놀아주는 시간을 줄일 수도 없었다. 다만, 대안은 내 잠을 줄이는 것 밖에 없었다.


 아빠 품에 가지 않는 둘째는 수유 쿠션에 눕히고 강의를 들었다. 주말 강의를 들을 땐 아빠가 첫째를 전담해 주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에 족했다. 다른 주말은 떨어진 아이와 추억을 쌓으러 아쿠아리움도 가고 지역 축제도 다녔다. 주중에는 그간 배운 것을 아이와 놀이할 때 입으로 몇 번을 말하며 구조화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모를 땐 뛰어가 책을 뒤져 확인한 후 다시 이어갔다. 설거지나 빨래를 개울 때는 포스트잇으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외워야 할 것을 보며 외우기도 하고, 유튜브를 활용하여 계속 듣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낮잠 자는 시간은 같이 자야 했다. 아니면 나도 하루 체력을 보충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낮잠은 너무 자주 깨서 공부의 흐름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밤잠은 달랐다. 밤에 함께 잠을 자면 나의 하루 공부 시간은 너무 짧았다. 12시부터 하루 계획한 공부를 끝낼 때까지는 잠을 자지 않았다. 과목에 따라 편차는 있었지만 빠르면 3~4시, 늦음면 아이들이 아침잠을 깰 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아이가 입원할 때는 더없이 공부하기 좋았다. 아이 입원짐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책들을 챙겼고, 아픈 아이를 케어하며 공부했다. 간호사의 영양제라도 맞아야 할 것 같다고 엄마가 더 쓰러질 것 같다는 말에 링거줄은 공부할 때 방해가 된다고 거절했다. 그렇게 간호사와 나는 내가 잠을 잘 때 수액을 맞는 것으로 합의를 보기도 하였다.


 어쩔 땐 아이의 울음소리에 일어나다가 쓰러기도 하였다. 정신을 차리니 30분가량 지나가 있었다. 그저 잠이 부족했구나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내 몸을 돌보는 것은 사치였다. 심한 두통으롤 방바닥을 기어 다닐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친정 엄마한테 통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친정엄마가 오면 아이들은 식탁에 밥을 다 먹고도 아기 의자의 안전벨트에 메여 앉아 있고 딸은 그 옆에서 쓰러져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그게 반복되자 저녁시간이면 꼭 엄마가 전화를 하였다. 아이에게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꼭 그 시간에 쓰러지니 말이다.


  시험을 몇 달 앞두고는 그렇게도 하지 못하였다. 주말 저녁까지 함께 한 후 둘째를 아기띠로 안고 근처 카페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낮에 시험을 치는 시간에, 그 과목에 맞춰 모의고사를 풀며 시험 실전 연습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또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전 시간만 아이들을 좀 봐달라고 말이다. 친정 엄마가 오시면 아이들이 울든 말든 문을 딱 잠그고 공부했다.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찾는 소리에 울면서 공부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외치며 손으로는 문제를 풀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공부하지 못할 것이다. 계획형 인간이 계획을 짜는 시간조차 사치라 생각하고 공부했으니 말이다. 얼마나 공부했는지 타임랩스도 하지 않았다. 순 공부시간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온몸이 부서져라 공부했고, 실제로 몸조리를 포기하고 공부한 것이라 온몸은 삐걱거렸다. 그 사이 아이들은 참 많이도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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