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먼 나라다. 물리적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멀다. 비슷한 거리에 있는 유럽은 가깝게 느끼지만
북아프리카는 아니다. 우리와 교류의 역사가 없었고 현대 역사에서도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학교에서
자세히 배우지 않았고 신문이나 TV에서도 별로 보지 못했다. 아랍 이슬람권에 속한다고 하면 아, 하루에
여러 번 엎드려 기도하고, 여자들은 히잡을 쓰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끝난다.
그래도 유수한 출판사의 수상작이었던 소설『알제리의 유령』은 놀라웠다. “알제리에 도착한 건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닫힌 문에는 작은 표찰이 걸려 있었다. 오후 다섯 시 오픈.”
소설 제목의 ‘알제리’는 술집 이름이었다.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된 나라의 이름을 간판으로 단 우리나라
시골의 한적한 술집! 당황스러웠다. 할 말을 잃었다.
처음 도착한 알제 공항은 그렇게 낯설었다. 물결이 반짝이는 지중해를 건너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다 보이는 대지는 황량했다. 활주로도 잘 보이지 않는 헐벗은 땅 한가운데 비행기가 멈춰 섰다.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한 명씩 아래위로 훑어 보고 나서 내리게 했다. 트랩을 내려오니 짐칸에서 꺼내 놓은 캐리어들이
땅바닥에 죽 늘어서 있었다. 자기 캐리어를 찾으라고 하더니 바닥에 두고 그대로 열게 했다. 짐 검사였다.
낡은 공항 건물을 향해 가며 잠시 패닉에 빠졌다. 어디에 온 것일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20년 전 일이다. 그 시간 동안 알제 공항은 완전히 달라졌다. 첨단 시설을 갖춘 산뜻한 공항 되었다.
상상력의 부족은 나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겁이
없고 용감하다. 모험을 쉽게 한다. 상상력이 약한 사람은 그런 진취성을 보상으로 받는다. 그러나 부족은
여전히 부족이다.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많은 것을 놓친다. 한참 지나야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다.
너무 느리게 사태를 파악한다. 사람이나 풍경이 내 머릿속에 스며들어 선명해지는 데 걸리는 긴 시간 동안
안갯속에 산다. 그 흐릿한 시간 동안 잡지 못한 것을 안타깝고 아쉬워하는 데 그만한 시간을 또 보낸다.
알제 공항에 도착하면서 처음 만난 알제리인이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는 데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알제리에 가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이며, 어떤 만남을 하게 될 것인가는 내 허약한 상상력 밖이었다. 기억을
반추하면서 깨달은 것은 알제리에 발을 디디며 ‘알제리’라는 나라 전체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닥터 키아티, 공항에서 처음으로 만나 인사했다. 바로 그가 지금까지 알제리가 가게 했던 아니 갈 수 있게
해 주었던 인물이다. 그가 있는 한 알제리는 내게 언제나 그 앞에 서면 열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에 서서 열려라, 참깨! 주문을 외우면 늘 동굴이 열렸다. 누구든 만나게 해 주었고, 어디든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알제리 전체였다. 그리고 나는 만능열쇠를 손에 쥔 전능자가 되었다. 내 인생의 불가해한 행운이었다. 그 엄청난 행운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룬 것이 많지 않았다면 전적으로 내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겸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첫 방문에서 여러 대의 차량이 호위를 받으며 남서부 도시 티아레트에 내려 가게 해주었다. 연구비 지원을
받아 다른 동료들과 갔을 때는 카빌리의 티지-우주까지 직접 운전해서 데려다주었고 알제리 동쪽 일대와
사하라 북부까지 여정을 준비해 주었다. 어디를 가고 싶다고 연락하면 일정을 짜고 차편과 숙소를 준비하고 도와줄 사람을 대기하게 했다. 그렇게 베풀어준 배려로 여러 곳을 갈 수 있었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네 번째 알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알제 시내로 들어가는 대신에 천 킬로 떨어진 가르다야 행 국내선
비행기를 갈아타게 했다. 밤 비행기에서 불을 켜고 노트북에 글을 쓰고 있었던 모습은 카라바조의 바로크풍 초상화처럼 뚜렷한 명암으로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매번 다음에 가겠다고 미루었던 사하라 중심에 있는
음자브 계곡의 천 년 고도 가르다야를 그렇게 방문할 수 있었다.
어떤 도시를 가도 그의 친우들이 마중 나왔다. 오랑에서는 사업가가 마중 나와 커피를 대접해 주었다.
크산티나에서는 항공사 직원이, 세티프에서는 대학 부총장이, 가르다야에서는 음지브 부족의 부족장이 맞아주었다. 흰 눈 덮힌 랄라 카디자 봉우리가 보이는 카빌리에서는 베르베르인 건축업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하라 ‘그랑 쉬드’의 두 도시 쟈네트와 타만라세트에서는 의사가 한 사람씩 기다렸다 맞아 주었다.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처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어 늘 감탄했다.
인적 네트워크가 폭넓은 만큼 활동도 다양한 인물이다. ‘닥터’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 의사이고
박사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행정가이고 비정부 단체의 책임자다. 알제, 파리, 브뤼셀, 워싱턴에서 수련의
과정을 거쳐 알제대학 교수로 알제병원 의사를 활동했고 여전히 활동 중이다. 사회 활동 외에도 100권이 넘는 의학과 알제리 현대사 서적을 집필했다. 내 서가의 한 칸은 그의 저서로 채워져 있다. 그의 많은 활동
가운데서 직접 목격한 것은 천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조직한 비정부단체 Forem의 운영이었다.
캐나다 대사와 동행하는 방문단에 내가 들어간 것이나 오스트리아 대사관저의 전통 건축을 감상하게
해 주었던 것은 그가 후원금을 모금을 위한 방문을 동행한 것이었다는 것을 사후에 알았다.
첫 방문에서 Forem의 지부 세 곳을 방문하게 해 주었다. 독립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이 자력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센터들이었다. 컴퓨터가 몇 대 비치되어 있었는데, 아주 낡은 기계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알제리로 보낼 컴퓨터를 모았다. 대학과 연구소들에서 기계를 업그레이드하면서 폐기할 컴퓨터를
모았다. 200여 대가 모였다. 컴퓨터들을 쌓아둔 채 시간이 흘렀다. 실어 보내는 비용이 엄청났다.
키아티 교수의 지인이 비용을 맡았다. 약속을 지켰던 것이 신뢰를 얻게 되었을까? 후에 돌아보면 한글 자판과 소프트웨어가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닥터 키아티와 나는 공통점이 없다. 종교, 성별, 나이, 전공 분야, 그 어떤 것에서도 겹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일을 같이 했다. 공공 기관들 간 협력, 한국어 강좌 개설, 공동 학술대회, 연구소 간 공동 프로젝트,
사업가들의 진출 등등. 둘 모두 전혀 관련 없는 분야 이야기들로 수많은 메일을 부지런히 주고받았다. 오후에 메일을 보내면 다음 날 아침이면 답장을 받았다. 그렇게 정확한 메일 답신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일주일 넘게 답장을 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일까? 감히 재촉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메일이
도착했다.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는 사하라 사막 지역을 순회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다 연락이
두절되었다. 다시 집중적으로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다시 긴 침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또 메일이
오갔다. 그렇게 끊어질 듯 이어간 20년이었다.
사실 같이 추진했던 일들이 잘 진행되었다기보다는 번번이 두 나라 사이의 교류가 얼마나 힘든지 느끼는
기회였다고 해야 한다. 대체로 그랬다. 사회가 너무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너무 다르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다. 열과 성을 다해도 성사되지 않았다. 어떤 일은 잘 될 것 같았지만 중도에 포기해야 했고,
어떤 일은 마무리만 남은 상태에서 관련된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누구를
비난한 적이 없었고 원망한 적이 없었다. 늘 앞으로 나갔다. 다른 일이 나타나면 기꺼이 헌신했다.
긴 시간 우정을 지속하게 해 주었던 둘의 접점이었다.
오아시스 엘골레아에서 알제로 오는 사막 한가운데서 잠깐 차에서 내리게 해 모래 위를 걷게 해 주었다.
치밀하게 쌓여 있는 모래는 얼마나 단단한지 얕은 발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아, 이래서 모래에 푹푹 빠지지
않고 차들이 다닐 수 있구나! 망망한 모래 바다에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이 나타나 수줍게 웃는 소년을
만났다. 공을 선물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막의 문’ 라구아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맛있는 곳이라며 튀김 과자가 가득 든 큰 봉지를 사서 들고 왔다. 식사 시간이 되면 걸쭉한 스우프 쇼르바
한 그릇에 빵 한 조각을 먹는 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에서 디저트로 나온 꿀을 뿌린 쿠스쿠스
밀이 맛있다고 했더니 가는 길에 먹으라고 잘 싸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내 배낭의 남은 자리에
오렌지를 잔뜩 넣어주었다. 오랑으로 가는 비행기 표가 매진되자 아는 사람들을 찾아 알제 공항을 분주히
돌아다녀 드디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왜인지 알 수 없이 각인되어 있는 기억의 조각들, 서로 연결되지 않고 퍼즐처럼 모아도 그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 같지도 않은 지난 시간의 파편들이 마음을 만들고 믿음을 만들었다.
사람 사이를 ‘인연’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만나는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을 그렇게 필연으로 이해한다. 불가해를 이해의 영역으로 전환해 평안을 주는 마술적인 단어다.
서로 눈을 보고 말을 나누고 나서 다시 볼 기회가 없었던 수많은 알제리 사람들과 나는 무슨 인연이었을까? 그리고 그들 모두를 만나게 해 준 키아티 교수와는 무슨 인연이었을까? 혹시 나는 전생에 알제리 사하라
사막에서 태어나 낙타를 타고 다니며 키아티 교수를 측근에서 보필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가 베풀어준
성의와 배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독실한 무슬림인 그의 알라 신은 대답을 해주실까?
그 깊은 인연으로 그의 알제리는 나의 나라가 되었다.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