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정부가 유대인에게 사죄했다. 6년 전 2019년이었다. 원하면 스페인 국적을 돌려주겠다고 선언도 했다. 유대인 13만 명이 스페인 사람이 되었다. 유대인에게 사죄한 것은 독일뿐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스페인은 유대인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5백 년 전 이사벨 여왕이 유대인들에게 내렸던 혹독한 명령 때문이다.
이사벨 여왕? 맞다. 콜럼버스를 후원해서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했던 바로 그 스페인의 여왕이다. 여왕은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넜던 1492년 스페인 땅이 살고 있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했다. 살던 땅 팔레스타인을 떠나 이주한 지 천 년도 넘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4개월을 줄 테니 짐을 챙겨 나가라고 명령했다. ‘알함브라칙령‘이다.
신하들이 반대했다. 유대인들은 전쟁이나 신항로 개척에 돈을 대주었으며, 세금 징수나 회계에서 꼭 있어야 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여왕은 잠시 망설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내쫓아라! 한 명의 유대인도 남기지 말라! 유대인들은 재산을 포기하고 수레를 끌며 걸어서 포르투갈을 거쳐 마그레브, 네덜란드, 베네치아 등으로 이주했다. 네덜란드는 쫓겨난 유대인들을 받아들여 도시 암스테르담을 건설하고 100년간 번창했다.
이사벨 여왕은 왜 그렇게 비인간적인 명령을 내렸을까? 깊은 신앙심이 한 원인이었다.
콜럼버스가 떠난 후 2년이 지난 1494년 교황청은 이사벨 여왕과 남편 페르난도 왕을 ‘렉스 카톨리쿠스’, 즉 ‘가톨릭 왕’으로 봉했다. 다음과 같은 업적이 근거였다. 십자군 운동을 펼쳐 이교도 이슬람이 8백 년 간 점령하고 있던 영토를 되찾았다. 그 유명한 레콩키스타, 즉 기독교회복운동을 완성한 것이다. 아라곤과 카스티야를 평화롭게 통일했다. 교황청을 프랑스의 점령에서 벗어나게 했다. 여기에 막강한 경력이 추가된다. 가톨릭 신앙을 전 세계에 전파한 것이다. 남아메리카 인구의 2/3가 가톨릭이 된 것도, 필리핀이 가톨릭 국가가 된 것도 이사벨 여왕의 공적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수준의 업적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례를 받지 않는 유대인을 추방했다.
1957년 교황청에는 이사벨 여왕을 ‘복자’의 명단에 올려 달라는 청원서가 접수되었다. ‘복자’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공적 공경”을 받아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 직전 단계를 말하는 단어다. 즉 여왕을 성자로 공식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교황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독교 여왕’으로 봉했으면서 왜 망설이는 것일까?
가톨릭 교회가 이단 종파들을 압박하고 제거하는 정화운동이었던 종교재판은 13세기부터 남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교회가 주관하고 성직자들이 재판관이 되어 판결을 내리고 처벌했다. 1478년, 이사벨 여왕이 즉위하고 4년이 지난해 스페인에서도 시작되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이 척결의 대상이었다. 페스트가 스페인을 휩쓸었을 때 유대인 때문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고문과 협박으로 유대인의 절반을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했는데, 이들 중에 가짜가 많으니 찾아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잊는지!
종교재판은 재판이 아니었다. 누가 고발했는지 알 수 없었고, 왜 잡혀가는지 알지 못했다. 돼지고기를 안 먹더라. 금요일에 목욕을 하더라. 가족이 모여 창문을 가리더라. 이런 몇 마디면 충분했다. 증거도 필요 없었다. 고문하면 자백하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범죄자’는 밤중에 예고 없이 끌려가 갇혀 여러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다. 주로 발가벗겨 두 손을 모아 매달아 어깨가 빠져 아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죄가 선고되면 화형에 처했다. 범죄자에게 죽으면 보게 될 지옥을 먼저 체험하게 하고, 이 땅에서는 ’ 불순물’을 태워 없애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단을 척결하면서 여왕은 큰 이득을 보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 왕권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돈 많은 유대인들이 두고 떠난 재산을 몰수해 왕실 금고가 넉넉해졌다.
교황청도 모르지 않았다. 이사벨 여왕은 종교재판소를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단숨에 거절했다. 그렇지만 결국 판결과 처벌을 시행할 권한을 주었다. 세비야의 종교재판소는 다른 재판소보다 더 극성스러웠는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에 그치지 않고 이슬람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나 기독교도까지 가차 없이 처단했다. ‘토케마다’, 책임자였던 유대계 사제의 이상한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종교재판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유럽을 넘어 남아메리카 식민지까지 수출되었고, 16세기 중반이 되면 루터파 신교도들까지 표적이 되었다.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불행한 사건이었다.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이 1834년이었으니 약 600년 간 계속된 것이다. 희생된 숫자는 아직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한 역사가는 3세기 동안 3만 명 정도가 사형되었다고 추정한다. 바티칸 교황청은 관련 자료를 장시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500년이 지난 1998년 비로소 공개했다. 그러니까 공개된 자료로 종교재판을 연구한 지 30년도 되지 않는다.
이사벨 여왕은 53세 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왕의 자손들은 독실한 신앙인들이었다. 외손자 카를 5세는 가톨릭을 지키기 위해 지중해에서 이슬람과 전쟁을 했다. 외손녀인 메리 여왕은 영국을 가톨릭으로 돌려놓기 위해 ‘블러디 메리’가 되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이름을 남긴 증손자 필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가톨릭으로 만들기 위해 심하게 탄압해 결국 독립전쟁을 하게 했다. 직계 자손은 아니지만 스페인 통치자의 자리를 물려받은 총통 프랑코도 가톨릭을 국교로 다시 지정했다.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성주간을 지키며 극장과 영화관도 가지 못하게 했다.
여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주장한다. 유대인에게 가혹한 처사였지만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을 환영했던 나라는 없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변명거리가 되는 것일까? 다른 변명도 있다. 이교도와 있으면 신도들이 오염된다며 추방하라고 명령한 것은 교황이었다. 여왕은 교황에 복종했을 뿐이다. 그런데 혼자 비난을 받다니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왕이 소극적으로 끌려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종교재판을 멈추지 않았다. 궁전 내부에 까지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여왕은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힌 것이다. 쉽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알함브라 칙령’은 1967년 거의 5백 년 만에 공식적으로 폐기되었고, 스페인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사과했다.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살았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다. 이미 천 년 동안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초를 남들이 겪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500년이 지나 스페인 사람들처럼 사죄를 할 것인가?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